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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중국의 속국이 아니었을까? - 종주권과 속국 그리고 조공국 등 개념사를 중심으로 -카테고리 없음 2021. 12. 2. 00:03
속국은 전근대 자료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며, 노태돈·정병준도 전근대의 속국과 근대의 속국 개념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즉 현대에서 속국이라 하면 종속국이나 비자주적 보호국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 속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중국 왕조의 영토 내에 포함된 이종족 집단이며, 다른 하나는 조공국을 속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 영토 내의 이종족 집단과 조공국은 엄밀하게 구분되는 존재이다. 조선은 중국의 속방으로서 내치와 외교 부문을 모두 대조선국 군주가 자주해 왔다고 한다. 즉 중국 왕조와 조공 책봉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과 자주권을 행사한다는 것이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이석현. "중국의 번속제도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중국 번속이론과 허상》. 동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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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책봉 관계는 종주국-속국 관계와 다를까? - 일국사적 시야의 문제점 -카테고리 없음 2021. 10. 5. 07:27
최근 블로그 방문량이 갑작스레 늘어 찾아보니 부흥 카페에서 필자의 게시글이 댓글창에¹ ² 거론되어 유입 인원이 증가한 것이었다. 대체적으로 필자를 비롯한 아마추어층이나 대중적, 그리고 학계 일각은 여전히 '조공'이라는 형식의 동일함을 실질의 동일함으로 일반화하는 문제점과, 일국사적 관점에 기반한 특수성 부각이라는 문제점을 앉고 있다. 혹자는 명청대 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종주국과 속국의 개념으로 보는 논자들에 대하여 "이러한 견해는 중국과 조선 사이에 존재하는 이해의 충돌이나 의견차이에 의한 갈등을 간과한 것이다"고 하면서, "한반도와 중원의 국가 사이에 맺은 조공책봉관계가 강대국의 결정을 약소국에서 수용하는 일방적인 관계로 해석될 수는 없다."고 하였다.³ 적어도 명청대 중국과 조선을 강대국과 약소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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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제국의 국제질서 속 조선의 위상카테고리 없음 2021. 1. 15. 21:49
1637년 이래 '조공책봉관계'를 수립한 청 제국과 조선의 관계에 대해 근래 한국 학계에서는 미국의 신청사 연구 기류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면모들을 조망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조선의 위상에 대해 특수하다거나, 피상적으로는 '모범'이라고 설명한다는 것이며, 그 배경에는 무력에 의한 복속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2020년 7월, 독일 베를린 훔볼트포럼(Humboldt Forum) 한국관 전시 방안을 두고 담당 큐레이터가 당시 "문화재 수집가 등이 조선을 중국의 '속국'이라고 인식하고 조선의 문화재를 구하는데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라고 설명한 것이 대중적 파장을 일으키고, 지원을 약속한 한국국제교류재단이 8월 말 박물관 측에 지원을 연기할 것을 통보한 사건에서 보이듯이 한국 대중은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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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책봉은 동양의 보편적 외교 관계인가? - 명청대를 중심으로 -카테고리 없음 2020. 12. 25. 23:12
굳이 한중 네티즌 간의 분쟁이 아니더라도 한국인들 사이에서 종종 이슈가 되는 조선 왕조의 정치적 위상 문제에 대해 일부 국내외 사학자 및 대중의 일반적 인식은 조선의 위상인 '조공국(Tributary state)'은 '속국(Vassal state)'이 아니며, 이른바 '조공책봉관계'는 동양의 보편적 와교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조선의 조공 행위를 경제적 욕구가 추동한 동양의 보편적인 외교관계로 일반화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조공국'은 '속국'이 아닐까? I. 도식화 될 수 없으며, 중화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조공' 동양의 보편적 외교관계로 설명되는 조공은 주대 봉건제라는 기원을 갖는 유서깊은 외교 방식으로 설명되지만, 명대 이래 조공은 몽골제국의 교역망의 기조 위에 명과 상대국의 이해관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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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결정적 원인이 청의 식량난이라는 속설에 대하여 - 홍 타이지를 중심으로 -카테고리 없음 2020. 12. 20. 15:44
명청교체기, 명 질서의 붕괴를 상징하는 병자호란은 2019년 전후로 새로운 연구 성과들이 제출되는 등 임진왜란에 이어서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와 함께 필자를 포함한 이른바 '역덕후'들 사이에서도 병자호란에 대한 논쟁이 활발해졌는데, 이 과정에서 출처불명의 와언들이 '최신 학설'로 둔갑되어 알려지고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청군 차병이 허위라는 주장과 함께 사료와 연구들을 단장취의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본다. 병자호란의 동인은 청의 경제적 문제인가 근래에 이른바 '역덕후' 집단 일각에서는 병자호란은 조선이 어떤 행보를 보였어도 일어났을 전쟁이라고 주장하면서 병자호란의 동인, 즉 핵심적인 계기를 소빙하기와 명의 무역 봉쇄 등에서 찾는다. 실제로 청은 이러한 연유로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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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몽골주의와 몽골민족주의를 통해 보는 대청제국이 몽골에게 남긴 유산카테고리 없음 2020. 7. 18. 03:40
17세기 초, 누르하치(Nurgaci)가 명의 요동 지역을 정복하면서 후금은 본격적으로 명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대두하게 되는데, 후금은 그와 동시에 반(反) 차하르(čaqar) 연대 및 무력을 동원한 복속이라는 방식으로 코르친(qorčin)과 연합을 맺고, 내칼카(qalq-a) 5부를 지배할 수 있었다. 누르하치에 이어 후금의 군주가 된 홍 타이지는 차하르와의 경쟁 과정에서 연대한 몽골계 세력들을 지휘하면서 이들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군령을 적용할 수 있는 지도(tutelage)체제를 마련했다. 그는 차하르 릭단 칸(ligdan qa'an)의 병사 이후 릭단 칸의 부인인 난난 태후(囊囊太后) 및 수타이 태후(苏泰太后)와 그 아들 어르커 콩고르(erke qonggor) 어저이(ejei)를 수습하면서 최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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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세기 한중관계를 통해서 본 몽골제국의 유산카테고리 없음 2020. 6. 27. 20:28
14세기 후반 주원장이 북벌을 단행함으로써 카안 울루스는 갑작스레 한지(漢地, 키타이)를 상실하고 말았다. 쇠퇴하고 있던 몽골제국이 마침내 해체된 것이다. 홍무제는 군웅들을 쓸어버려 화하를 안정시키고 오랑캐[胡虜]를 구축하여 중화를 회복했음을 대내외적으로 표방하였다. 그는 송조의 형세가 기울면서 중국의 안주인 노릇을 하던 북적 원조와의 단절을 주장했으나 결코 몽골제국의 유풍을 지울 수 없었다. 강남(만지)의 무장봉기집단에서 출발하여 오랑캐를 축출한 홍무제는 국호를 대명(大明)으로 정하였다. 이는 주원장을 비롯한 수많은 홍건적들의 신앙인 백련교의 영향이 드러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쿠빌라이 카안이 천신신앙에 기반하여 커다람을 극도로 강조한 추상명사 대원(大元)을 국호로 삼은 것을 계승한 것이다. 통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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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 왕조는 탁발국가인가? 한족국가인가?카테고리 없음 2019. 11. 23. 22:13
최근 학계에서는 당 제국을 '탁발국가'로 보는 시각과 기존의 '한족국가'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탁발국가'라는 용어는 탁발 씨족을 중심으로 융합된 다양한 종족들의 실체를 축소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며 서위북주와 동위북제 그리고 수당제국을 호계(胡系) 왕조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다. I. 북위 효문제의 한화정책의 실체 대흥안령 산맥 북동부 알선동(嘎仙洞) 인근의 대선비산(大鮮卑山) 일대에서 36부 99씨족을 통솔하던 탁발(拓跋) 씨족의 수장 추인(推寅)은 남쪽으로 서진하여 대택(大澤: 후룬 부이르)에 도달하였고, 그 후손 힐분(詰汾)은 흉노의 고지(내몽고 중부)로 세력을 옮겼다. 이후 이들은 대(代)와 북위를 건설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탁발의 수장들은 흉노(匈奴, Xwn)·강(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