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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 제국의 국제질서 속 조선의 위상
    카테고리 없음 2021. 1. 15. 21:49
    1832년에 청대 수학자 동우성(董祐誠)과 지리학자 이조락(李兆洛)이 《강희황여전람도》와 《건륭십삼배도》를 바탕으로 제작한 《황조일통여지전도(皇朝一統輿地全)》. 《강희황여전람도》에서 조선을 청의 강역으로 그려넣은 것을 담습한 지도 중 하나이다.


    1637년 이래 '조공책봉관계'를 수립한 청 제국과 조선의 관계에 대해 근래 한국 학계에서는 미국의 신청사 연구 기류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면모들을 조망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조선의 위상에 대해 특수하다거나, 피상적으로는 '모범'이라고 설명한다는 것이며, 그 배경에는 무력에 의한 복속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2020년 7월, 독일 베를린 훔볼트포럼(Humboldt Forum) 한국관 전시 방안을 두고 담당 큐레이터가 당시 "문화재 수집가 등이 조선을 중국의 '속국'이라고 인식하고 조선의 문화재를 구하는데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라고 설명한 것이 대중적 파장을 일으키고, 지원을 약속한 한국국제교류재단이 8월 말 박물관 측에 지원을 연기할 것을 통보한 사건에서 보이듯이 한국 대중은 '조공책봉관계'가 형식논리에 다름없고, 청대 조선의 위상을 수많은 조공국 중 하나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대중적 인식의 기저에는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심리가 깔려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인식의 대표적인 논거로는, 명대 조선이 조공을 3년 1공으로 제한하는 조치에 대해 1년 3공을 요청하여 받아낸 것이 있다. 즉, 이를 통해 조공과 책봉은 어디까지나 경제적 이윤을 남기기 위한 허례허식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애시당초 3년 1공과 1년 3행은 다른 차원의 개념에다가, 조선의 1년 3행이 홍무연간 이후에 별다른 마찰없이 명 제국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문이(文移)가 동일하고 예를 다하여 조공했기 때문이다. 예를 다하였다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명 제국의 지배질서 하에서 변경의 독자 세력의 흥기를 방지하고, 경제적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종속 관계를 유교의 예교 질서로 합리화하며 지성사대하고자 한 조선에 대한 '찬사'다.

    조선의 종속성이 청대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청대 조선이 과연 종종 조공을 통해 경제적 이윤을 챙긴 수많은 '조공국(tributary state)' 중 하나에 불과하며, 본질적으로 청 제국과 관계를 맺은 국가가 모두 조선과 같은 실상의 관계를 맺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637년부터 1776년에 걸쳐 사용된 조선국왕지인 3종, - 성인근(2010). 《고종 황제의 비밀 국새》. p. 21.

    먼저 책봉에 있어 조선국왕의 위상을 살펴보자. 청대 한문 사료에서 '조공'이란 사실상 칭신·신속을 전제하고 있다. 책봉이나 책봉에 준하는 칭신 행위가 있었기에 조공을 행할 수 있다고 간주한 것이다. 청대 책봉을 위해 칙사를 파견한 유형은 조선, 류큐(琉球), 베트남(越南) 세 나라에 불과했으며, 조공 사절에게 칙(敕), 인(印)을 수여하여 돌아가게 하는 영봉(領封)의 유형은 사얌(สยาม), 버마(ဗမာပြည်), 란쌍(ລ້ານຊ້າງ) 총 6국에 불과하다. 그 중에서 사얌, 버마, 란쌍국왕에 대한 책봉은 일회성·이벤트성을 띄는 책봉에 불과했다. 1673년 강희제로부터 섬라국왕으로 책봉받은 것은 아유타야의 군주 나라이(นารายณ์)였고, 1786년 건륭제로부터 책봉받은 것은 정화(鄭華)라는 이름으로 탁신(ตากสิน, 郑昭)의 왕자를 사칭한 랏타나코신의 군주 풋타엿파쭐라록(พุทธยอดฟ้าจุฬาโลก)이므로 개별 왕조들에 대한 책봉이었다. 버마의 경우, 1790년 건륭제의 팔순만수를 축하하는 과정에서 꼰바웅의 보도파야(ဘိုးတော်ဘုရား, 孟雲)를 임시적으로 면전국왕으로 책봉한 것이 끝이며, 란쌍의 경우에도 1795년, 권력다툼 과정에서 축출되어 운남과 베트남 변경을 떠돌던 옹 만쿠[溫猛]를 건륭제가 재위 60년을 기념하며 임시적으로 왕봉(王封)한 것이었다. 즉, 영봉의 형태로 책봉을 받은 나라들은 칙사의 파견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사실상 책봉을 받아왔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청의 칙사가 파견됐던 류큐의 경우에도 1653년, 그 군주 쇼시쓰 왕(尚質王)이 입조하면서 류큐국왕지인(琉球國王之印, lio cio gurun-i wang ni doron)을 사여받는 등 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어오긴 했으나, 류큐는 일찍이 1600년대 초 서일본의 사쓰마 번의 침략을 받고 쇼네이 왕(尙寧王)이 포로가 되어 가고시마에 압송되어 에도까지 방문했다가 2년 뒤에 귀국한 이래 실질적으로 일본에게 종속되어 있었고 명 제국과 조선의 당국자들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이후 명청과의 '조공책봉관계'는 상대적으로 허례허식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의 경우, 정치적·경제적 필요성의 부재로 인해 청 황제권의 무관심 속에서 베트남 군주가 중국과 인접한 하노이에서 책봉받거나, 삼궤구고두례 같은 청조의 예법 대신 베트남의 예법을 시행하는 등 철저한 '외왕내제'를 구현했으므로 청 황제권의 월남국왕 책봉은 허구성을 띈다고 하겠다.

    반면 조선은 어떠한가. 공민왕 이래 조선국왕은 명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아야만 그 대내외적 정통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으며, 1637년 삼전도의 항복으로 인해 명청교체 이후 조선국왕은 청 황제권의 책봉없이는 즉위할 수 없었다. 명대에는 태조, 중종, 광해군, 인조의 조선국왕 책봉 주청과 선조대 5차례에 걸친 광해군의 세자 책봉 주청이 명 황제권에 의해 거부된 적이 있는 만큼, 청조에서도 이러한 내정 간여는 언제든지 일어닐 수 있었다. 제국은 강희연간 삼번의 난과 대만의 정복이라는 대내외적인 혼란 속에서 다양한 예제적 방식을 통해 조선을 청 제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확고부동하게 종속시켰다. 1680~90년대 강희제가 예제를 정비하고 강화하는 과정에서 조선은 명분이 미약한 폐위된 희빈 장씨 아들 이윤(경종)의 세자 책봉을 주청하자, 예부와 강희제는 "왕과 그 비가 오십이 될 때까지 적자가 없어야 비로소 서장자를 왕세자로 세울 수 있다(王與妃五 十無嫡子 始立庶長子爲王世子)"는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근거로 이윤의 왕세자 책봉을 거부하는 칙유를 내렸다. 숙종은 책봉의 불허 소식을 접하고 정사 서문중, 부사 이동욱, 서장관 김홍정을 삭탈관직하고 문외출송하도록 하는 등 사신들을 가혹한 처벌로 다스렸다. 이후 강희제가 숙종의 정비 소생의 아들이 없다는 조선의 사정을 들어 특별히 책봉을 윤허하였으나, 외국과 종법의 차이를 내세운 조선의 입장은 위계질서에 따라 철저히 무시당했으며, 이후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 과정에서도 강희제가 칙서에서 왕위는 부자 계승이 올바른 도리이고 형제 계승은 임시방편일 뿐으로, 단지 조선이 간곡히 주청하여 마지못해 윤허한 것이라 비판하면서, 적장자가 생길 시에 왕세자를 세워 다시 세자 책봉을 주청할 것을 명했다. 즉, 전례와 명분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었다.

    양광총독 손사의가 레 민제를 책봉하는 묘사한 그림.


    칙사의 인선에 있어서는 어떠할까? 1647년 순치제는 조서를 반포하여 동남해외의 류큐, 안남(安南), 사얌, 일본 등 여러 나라가 절강과 복건[浙閩]의 부근에 있으므로, 내조할 시에 조선국과 같이 우대할 것임을 밝혔으며, 강희연간에 편찬된 《흠정대청회전(欽定大淸會典)》에는 각국의 차서(次序)를 첫 입공을 기준으로 하면서 조선에 대하여 제번(諸番) 중 칭신입공이 가장 빨랐다 적고 있다. 건륭연간 예부상서 더바오(deboo, 德保)는 외국의 반차에 대한 황제의 하문에 대하여 조선이 첫머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대조선 칙사 인선에 있어서 종3품 이상의 만주 관원을 보낸다는 관행이 확립되었다. 한인 배제는 청말 한인 신사층이 대두될 때까지 철저하게 지켜졌다. 반면, 류큐와 베트남에는 만한(滿漢)을 가리지 않고 5품 이하의 하급 관원을 보냈으며, 베트남의 경우는 1788년 양광총독(兩廣總督) 손사의(孫士毅)가 레 민제(黎愍帝)를 책봉한 이래, 중앙관이 아니라 지방관인 광서안찰사가 책봉사로 파견되었다.

    1673년에 정해진 종실 봉작 책봉에 관한 의례에 따르면 청은 군왕(郡王, giyūn wang) 이상을 책봉할 때는 3품 이상을, 버이러(beile, 貝勒) 이하는 5품 이하의 하급 관원을 파견했다. 조선국왕에 대한 책봉은 책봉사가 파견된 류큐나 베트남에 대한 책봉에 비하여 확실히 그 급이 높았던 것이며, 이는 17세기 중후반 청의 칙사들이 빈번하게 파견되어 노골적으로 내정에 간여할 때나, 18세기 이후 양국의 경조사에 따른 의례적인 칙사가 종종 방문할 때나 결의 차이가 없었으므로 단순히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예부의 관원이 … 이종(李倧)의 반차(班次)에 대해 주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위세로써 그를 떨게 하는 것은 덕(德)으로써 그를 품는 것만 못하다. 조선의 왕은 비록 병세에 몰려서 내귀(來歸)하였지만, 역시 일국의 왕이다"고 하였다. 명을 내려 앞으로 다가와 좌측에 앉도록 했다. … 그 다음으로 좌측에는 호쇼이 친왕(和碩親王, hošoi cin wang), 도로이 군왕(多羅郡王, doroi giyūn wang), 도로이 버이러(多羅貝勒, doroi beile) 등의 순서로 앉았고, 이종의 장자 이왕(李汪)이 버아러의 아래에 앉았다. 우측은 호쇼이 친왕, 도로이 군왕, 도로이 버이러 등의 순서로 앉았고, 이종의 차자 이호(李淏)와 3자 이요(李㴭) 역시 버이러의 아래에 앉았다.
    《太宗文皇帝實錄》 권33

    이미 명대에 조선국왕은 이미 관료제적 질서에서 1~2품관, 작제적 질서에서는 친왕과 동급으로 여겨졌으나, 홍 타이지는 무력을 통하여 삼전도에서 조선국왕의 고두를 받아낸 뒤 반차에 있어서 조선국왕을 호쇼이 친왕보다 상위에 배치하였다. 종속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근현대적인 시선에 따르면 이러한 홍 타이지의 파격적 우대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후고에 대한 염려나 조선국왕을 통한 종주권을 관철하려는 의도에서 인조의 체면을 세워줬다는 해석은 딱히 부자연스럽지 않다. 어찌되었건 동북아시아 국제질서 속 한반도의 위치, 병자호란에서의 패전, 홍 타이지의 우대 등은, 훗날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윤을 목적으로 명목상에 지나지 않은 칭신입공 내지는 조공을 행했던 나라들과 조선의 위상을 비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761년 11월 숭경황태후의 칠순 만수성절을 조하하기 위해 방문하여 태화전 진정의 3품 문무 관원들 뒤 외국 사신들 중 첫머리에 배치된 조선 사신단을 묘사한 《만국래조도(萬國來朝圖)》 축.


    청이 파견하는 칙사가 아닌 조선이 청에 파견하는 사신의 접대에 있어서도 조선의 위상은 잘 드러난다. 물론, 동북 변경에 대한 강화 교섭 과정에서 조선 사신들은 러시아 제국의 베뉴코프와 파보로프에게 명대 이래 사용하던 옥하관을 양보해야하는 치욕을 겪기도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러시아와 청 제국이 대등한 관계를 상정했기에 종속 관계를 맺고 있는 조선에 비해 우대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청이 첫번째로 대등한 관계를 상정한 러시아의 사절을 제외하면 조선은 청에게 칭신입공하거나 청이 조공국으로 간주한 나라들의 사절에 비하여 상당한 우대를 받았다. 1748년 예부의 건의로 옥하교관방을 '조선관'으로 정하여 조선 사신들의 전용 관소가 설치됐으며, 건륭 연간에 제국의 팽창과 이벤트성 행사가 대대적으로 잔행되면서 조근(朝覲)의 사절이 많아져 관소가 부족해지자, 조선 사신단을 제외한 조공 사절은 외성의 회동관에 머물러야 했다.

    1780년 건륭제의 칠순에 대해 정조가 3차례에 걸쳐 진하·사은(謝恩)사를 성의를 다하여 특파하자, 1782년 이후 이후 조선 사신들은 예외 없이 연말·연초에 시행되는 수차례의 영송, 연회에 참석하여 청 황제를 대면으로 접견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조청관계는 또다른 증진을 경험하게 되는데, 황제가 의례적으로 조칙을 통해 조선국왕의 안부를 묻던 것은 황제가 사신에게 구두로 물어보거나, 구체적인 경사를 기원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신들은 황제가 시제나 운을 띄우면 그에 맞는 시문을 지어 올려 은상을 하사받기까지 했다. 이러한 양국 관계의 증진을 통해 조선은 청으로부터 "번봉의 직분을 정성껏 지키는(恪守藩封之職)", "세독충정(世篤忠貞)하는 외번", "자수하는 번봉(自守藩封)" 등으로 칭찬받았다.

    법제적 질서에 있어서도 조선의 위상이 드러나는데, 중외에 대한 황제의 법적 관할권이 발휘된 경우는 아주 드무나, 18세기 후반까지 청 황제권은 월경 문제나 조선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견제 차원에서 청의 법기(法紀)를 적용하여 그 왕에 대해 외번 몽골 왕공 등에게 내리던 "은을 거두는(weile gaimbi)" 처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는 봉건적 관계가 허구성을 띄거나 허례허식 내지는 극히 미미한 영향을 끼치던 다수의 조공국에서는 나타나지도, 나타날 수도 없던 일이었다.

    1638년 조선의 소극적인 원병에 대해 홍 타이지가 조선국왕 대한 법적인 처벌 가능성을 시사하였고, 1656년에는 조선인 월경 문제를 두고 조선국왕이 조사에 있어 부실했다는 이유로 그 부실조사에 책임이 있는 조선국왕에게 은 1천 냥, 표피 50장 등 구체적인 처벌 액수를 책정하기도 했다. 1666년 처음으로 현종이 벌은 1만 냥을 부과받고 실제로 5천 냥을 납부한 이래, 이를 합쳐 총 세 차례의 벌은이 부과됐으며, 홍 타이지가 조선국왕에게 부여한 반차에 따라 종실 친왕과 비슷한 액수로 책정되었다. 순치~강희연간 벌은의 부과가 선고된 것만 12회, 조선국왕에 대한 처벌 논의가 이루어진 것을 합치면 21회에 육박함으로 조선국왕에 대한 처벌논의는 단지 특수한 상황이라고 볼 수 없다. 순치~강희연간 월경인 문제, 조선 견제 등을 이유로 이루어진 조선국왕에 대한 처벌 논의는 옹정연간에 이르러 《대청율례(大淸律例, Daicing gurun-i fafun-i bithe kooli)》에 명문화되고 조선에도 문서가 전달되었다. 옹정 연간 이래 해당 조례는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조선국왕에 대한 처벌 논의는 건륭연간까지도 왕왕 제기되었다. 이러한 처벌논의가 점차 도태된 것은 조청관계의 안정화와 증진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공-책봉 패러다임에서 가장 핵심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 조공에 있어서도 조선의 실질적 종속성이 덧보인다. 쿠빌라이 카안(Qubilai qa'an)은 1218년 고려가 몽골과 형제맹약을 체결한 이래 상당한 양의 물자를 제공한 것을 바탕으로, 1263년부터 1280년까지 매해 복속의 댓가로 '세공'을 바치게 했으며, 이는 한국의 대외관계사에 있어서 정기적, 의무적으로 납부하는 '조공'의 시작이었다. 명을 건설한 홍무제 또한 고려-조선 왕조를 견제하고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한동안 금, 은의 수량을 강제하여 '세공'을 바치도록 했다. 한편 청은 1627년 정묘맹약을 계기로 조선으로부터 선물과 전리품 성격의 세폐를 납부받았으며, 1637년 정축약조 이후에는 세폐가 명에 대한 구례 중 하나인 1년 1공(emu aniya emu jergi alban)에 흡수되어 조공이 방물과 세폐로 이원화 되었다.

    1639년부터 세폐의 납공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조공의 일부로 규정된 세폐는 청의 실질적인 경제적 욕구가 반영되어 총액이 상당하였으며, 조선의 토산이 아닌 물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입관 이전까지 세폐는 1년 1공으로 '세폐사'를 별도로 파견하여 청 황제에게 수취당했다. 홍 타이지는 이듬해 세폐를 대폭 늘려 조선이 세폐와 방물을 모두 마련하는 데 약 50만 냥 정도가 소요되었으며, 1641년 입관까지는 40만 냥 이상의 수준을, 입관 이후에는 17~25만 냥 수준으로 감소했다. 조선말기까지 조공으로 인한 조선의 부담과 소득품의 가치를 비교했을 때 조선은 세폐와 방물 마련 비용으로 국가재정상 연평균 20만 냥 이상의 손실을, 칙행시에는 40만 냥에 달하는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1639년부터 1645년 강남 정복까지의 조선에 대한 청의 대대적인 곡물 수탈 및 이후에도 지속된 조선의 일방적 손실은 '자소사대'라는 유교적 명분이나, 대부분의 나라들이 청과 교역 과정에서 경제적 실리를 챙기기 위해 청의 조공 의례를 따라준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청초 조하(朝賀) 전 의례를 익히는 습의(習儀)가 부재하고, 실제로 조하가 이루어진 경우가 많지 않았다는 데서 드러나듯이 청이 계승한 명대의 구례는 조선과 실질적, 정치적 위계 관계를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의 성격이 훨씬 강했었던 것이다.

    조선이 천조에 신속하여 번복(藩服)의 법도를 엄격히 지켜온 것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다. 영이(英夷, 영국)는 조약(남경조약)을 맺은 이래 일체의 장정을 마땅히 모두 준수해야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시 천조(天朝)의 속국에 가서 사단을 일으키는가?
    《道光朝籌辦夷務始末》 권74

    근자에 들으니 조대비(趙太妃)가 이미 죽었다고 합니다. 아직 발상(發喪)하지 않았고 내일 쯤에 필히 반포(頒布)할 것 같습니다. 사려해보니, 한(韓, 조선)에 대상(大喪)이 생기면 조사(弔使)를 파견해야 합니다. 각국이 한성에 주재하고 있는데, 한왕(韓王, 고종)이 자주(自主)의 체면을 보존하고자 할 것입니다. 혹 화(華)에서 흠사(欽使)를 파견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에 곧바로 체제를 명확히 드러내어 각국에 확실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李鴻章全集》 23, G16-03-061

    조선의 조공을 액면 그대로 매우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하는 것은 조선의 예제적 지배질서가 관철된 실질적인 종속성을 무시한 결론이다. 청 제국의 '조공책봉관계'에 있어 조선은 단순히 외부 국가가 아닌 종속국이었다.¹ 그러한 종속성은 다른 피책봉국에서 드러나지 않는다.² 청 제국이 내륙아시아와 동아시아 그리고 일부 서양 국가들과의 교역 과정에서 그들의 무역 행위를 '진공' 내지 '조공'이라고 한 것을 일률적으로 이해해 조선 또한 수많은 조공국 중 하나에 불과하며, 양국 관계의 의례가 단순히 허례허식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비약일 뿐이다. 19세기 후반, 청조가 전통적 의례를 통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관철시키고자 한 것이나, 조선과 청 당국자들이 만국공법을 이해하기 전후로 기존의 '조공책봉관계' 하에서의 속국을 국제법 체계의 반주·속국(Semi-Sovereign and Dependent State)과 상응하여 이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해석하지 못하도록 시야를 가려버린다.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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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명청 제국과 조선의 관계를 '종주국-속국' 관계로, 조선을 '종속국'으로 보는 틀이 역사상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필자가 검토해본 바, 거시적인 측면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았다. https://chinua.tistory.com/13 참조.

    2). 조선의 특수성은 상술한 도광제의 상유 뿐만 아니라 "조선은 명에 대하여 비록 속국이라 일컬었으나, 대체로 이역 안과 다름없었다(朝鮮在明雖稱屬國 而無異域內)"는 《명사(明史)》 조선열전의 기록이나, "조선이 없으면, 중국도 없으니 베트남과 비교할 수도 없고, 운남이나 광동과 같은 먼 성(省)과도 비교할 수 없다."라는 원세개의 《적간론(摘奸論)》 등의 사료를 통해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3). 청말 대조선 정책의 입안에 있어, 청 조정과 북양대신 그리고 조야에서 어떤 인식을 가지고 어떻게 상호작용하여 조선을 반주, 속국으로 전유하려 했는지는 필자의 다른 글 참조. https://chinua.tistory.com/19

    근대 초기, 동양적 맥락에서의 '종속국'과 '식민지' 그리고 '자주 독립'에 관하여 -시암과 청 제국

    동아시아에서는 조선을 '속국(Vassal State)' 또는 '종속국(Dependent State)'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그중 한국에서는 모종의 역사적 맥락에 따라 그런 통념이 아주 굳

    chinua.tistory.com



    구범진(2008). 淸의 朝鮮使行 人選과 ‘大淸帝國體制’". 《인문논총》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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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범진(2010).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제언과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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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구(2017). "청질서의 성립과 조청관계의 안정화: 1644∼1700". 《동양사학연구》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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