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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세기 한중관계를 통해서 본 몽골제국의 유산카테고리 없음 2020. 6. 27. 20:28
14세기 후반 주원장이 북벌을 단행함으로써 카안 울루스는 갑작스레 한지(漢地, 키타이)를 상실하고 말았다. 쇠퇴하고 있던 몽골제국이 마침내 해체된 것이다. 홍무제는 군웅들을 쓸어버려 화하를 안정시키고 오랑캐[胡虜]를 구축하여 중화를 회복했음을 대내외적으로 표방하였다. 그는 송조의 형세가 기울면서 중국의 안주인 노릇을 하던 북적 원조와의 단절을 주장했으나 결코 몽골제국의 유풍을 지울 수 없었다.
강남(만지)의 무장봉기집단에서 출발하여 오랑캐를 축출한 홍무제는 국호를 대명(大明)으로 정하였다. 이는 주원장을 비롯한 수많은 홍건적들의 신앙인 백련교의 영향이 드러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쿠빌라이 카안이 천신신앙에 기반하여 커다람을 극도로 강조한 추상명사 대원(大元)을 국호로 삼은 것을 계승한 것이다.
통치사상과 정통성에 있어서 명은 카안 울루스를 계승하여 주자학을 관학으로 채택함은 물론 새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모순적이게도 《원사》의 편찬했는데, 이때 편찬을 맡은 주자학자들은 원대에 카안 울루스를 원조로, 원조를 정통왕조로 인정하고 있었으며 이를 남송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논리로 발전시켜 나아갔다.
지방제도에서도 명은 카안 울루스의 행성제도를 일정부분 계승하였으며, 군사제도에 있어서는 튀르크-몽골 유목민의 전통적인 십진법을 차용하여 군호를 편성하였다. 또한 홍무제는 친왕으로 봉해진 23명의 아들들에게 제국의 군사적 요충지를 분봉하였다. 이 중 9명의 친왕이 북방의 군사적 요충지를 분봉받아 몽골계 세력들을 방어하였는데, 역설적으로 몽골제국의 오랜 유산이 몽골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된 셈이다.
짐(카이샨 쿨룩 카안)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서 백성과 사직이 있어 왕 노릇을 하는 것은 오직 삼한(三韓: 고려) 뿐이다.
《高麗史》 권33, 〈世家〉 33.
고려는 칭기스 칸 이래 꾸준하게 몽골제국과 접촉하였는데, 우구더이가 카안이 된 이후에는 정주지대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생산 과정과 수단을 장악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고려에서도 몽골제국의 체계적인 수취시도가 발생했다. 뭉커 칸의 급사를 틈 타 반란을 일으킨 쿠빌라이가 당시 태자였던 원종과 변량회합이 이루고 원종을 보호한다는 빌미로 그를 본국으로 호송하여 압박과 회유를 통해 영안공을 필두로 한 사절단의 칭신을 받아냄으로써 '세조구제 불개토풍'을 조건으로 한 속국 관계를 성립시켰다.
고려는 쿠빌라이와 아릭 부카의 내전 조짐 속에서 속국의 지위를 얻어내 국가를 보전했으나, 그 군주는 더 이상 실질적으로나, 명목상으로나 최고권으로 군림할 수 없었으며 그 위에는 몽골제국의 카안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의 외교와 내정의 경계는 모호해졌는데, 충렬왕 이래 고려의 군주권이 고려국왕(외국지주) 외에도 정동행성승상, 부마 등으로 다원화되고 다양한 권력 집단이 출몰하면서 고려는 사실상 몽골제국의 종속국(dependency)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가 몽골제국의 종속국이 되면서 인적 교류가 매우 활발해졌다. 이 과정에서 몽골제국의 육류와 음료, 복식, 건축, 예술 등의 문화가 고려에 유입되고 변용되었다. 이러한 문화들은 조선시대까지 그 영향을 유지했다. 이처럼 고려는 국가를 보전했지만 몽골제국의 속령으로서 카안 울루스 문화의 영향을 다방면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고려와 명, 조선과 명의 관계에서 몽골제국의 유산은 무엇이 있을까? 14세기 중반에 이르면 고려국왕권은 부마의 지위의 약화와 정동행성 승상으로서의 권한도 일정부분 상실하는 것은 물론 국왕으로서의 자질, 카안 울루스 권신 정치 문제 등으로 인해 왕이 아예 폐위당하는 등 상당히 약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몽골 황실의 힘을 빌려 즉위한 공민왕은 몽골질서에 의해 추락한 국왕권을 재구축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행보는 카안 울루스의 쇠퇴와 맞물려 속국관계의 재편으로 이어졌다.즉위 초에 옛 철왕(哲王)의 도(道)를 본받아 사이(四夷)의 추장에게 신속히 통보하여 중국에 군주가 있음을 알게 하였다. 이때에는 통호하려고 한 것에 불과했다. 고려국왕 왕전(王顓)이 곧바로 칭신입공한 것은 의외였다.
《明太祖御製文集》권6, 〈諭中書却高麗請諡〉.
1368년 카안 울루스는 주원장이 이끄는 홍건군에 의해 화북을 상실하였다. 이때 명은 주변국에 사신들을 보내어 새로운 왕조의 선포와 자신의 즉위 사실을 알렸다. 이것은 단지 건국통보에 불과했다. 그러나 홍무제의 통보를 받은 고려와 안남 그리고 참파는 곧바로 표문을 올려 신하임을 자처하였다. 공민왕은 중원에 명이 들어선 시점에서 몽골과의 관계가 언제든지 속령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우려하여 곧바로 명에게 칭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책봉 요청을 비롯한 공민왕의 방식은 역설적으로 몽골복속기에 형성되고 익숙해진 관행의 일부를 명에게 요청한 것이었다.
책봉에 있어서 몽골복속기 이전 고려국왕은 책봉과 함께 책을 수여받았으나 몽골복속기 고려국왕은 정동행성 승상의 지위를 부여받으면서 송대 이래 5품 이상의 관직을 임명할 때 사용하는 고명을 하사받았다. 명은 이러한 관료제적 질서를 계승하여 고려-조선을 비롯한 속국 군주들을 책봉할 때 고명을 책봉문서로 하사하였다. 또한 1281년 쿠빌라이 카안은 카안 울루스의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충렬왕에게 '부마고려국왕지인(駙馬高麗國王之印)'을 하사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몽골복속기 이전 책봉국들이 주변국 군주들에게 사여한 위세품이었던 인장의 위상은 고려-조선에게 국왕의 관료제적 지위와 직결된 직인으로 변화했다.
외교문서에 있어서도 몽골복속기를 거치며 상당한 변화가 확인된다. 송대까지 중국과 주변국들은 군주 대 군주로서 책봉국은 조칙(詔勅)을, 조공국은 표주(表奏)라는 외교 문서를 교환하였으나, 몽골복속기에 고려국왕이 정동행성의 승상이라는 관료제적 지위를 부여받음으로써 중앙 울루스(γol-un ulus, 腹裏)의 행중서성과 문서를 교환할 때 2품 이상의 관부 사이에서 주고받는 평행문서 즉, 자문(咨文)을 교환하는 것이 새로운 관행으로 자리잡혀 명대 고려-조선은 물론 주변국에게도 적용됐다.유사(有司)가 대행왕(大行王)의 시호를 올리는 것을 논하자 왕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상국(上國)이 있는 마당에 나로서는 단지 시호를 청할 따름이다. 죽책(竹冊)이나 옥책(玉冊)이 또한 예(禮)에 부합하겠는가?”라고 하였다.
《高麗史》 권33, 〈世家〉 33.
고려-조선의 군주가 종주국에게 시호를 받는 관행도 몽골복속기에 형성된 것이다. 고려는 전기부터 책봉국으로 부터 상주국 훈위를 받았는데, 몽골복속기에 충선왕은 카안 울루스의 관료제적 질서에 근거하여, 자체적으로 선왕들에 대한 시호를 올리자는 신료들의 요청을 거부하고 카이샨 쿨룩 카안에게 정1품 상주국에게만 허용되는 3대 추증(충렬, 충경=원종, 충헌=고종)을 받아냈다. 이러한 관행은 우왕대 고려가 명에게 제시하면서 명청대 한중관계에도 관행으로 자리잡히고 종종 주변국에게도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속국의 배표례 시행에 있어서도 몽골복속기 이전 조공국에서 책봉국 군주를 대상으로 배표례를 시행한 적이 없는 사실이 주목되는데, 조공국이 황제를 대상으로 배표례를 시행한건 몽골복속기인 1302년 충렬왕 치세였다. 기존에 배표례는 5품 이상의 관부가 거행하던 것인데, 충렬왕이 카안 울루스로 부터 정동행성의 승상이라는 관료제적 지위를 부여받음으로써 시작한 것이다. 정동행성 승상과 고려국왕은 지위상으로 구분되는 것이나, 두 지위의 책무를 다하는 것은 한 명이었으므로 배표례는 점차 고려군주의 관행으로 자리잡아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행은 고려가 명에 《번국의주》를 요청함으로써 명에게 계승되어 대한제국 선포까지 지속되었다.하윤이 민제에게 이르기를,
"만일 대국(大國: 명)의 원조를 얻는다면 동성(同姓)이나 이성(異姓)이 누가 감히 난(亂)을 일으키며, 난신(亂臣)·적자(賊子)가 어떻게 생기겠습니까? 전조(前朝: 고려) 때에 원조에서 공주(公主)를 하가(下嫁)시켜 100여 년 동안 내외(內外)에 근심이 없었으니, 이것은 지난날의 경험입니다." ...... 임금(조선 태종)이 노하여 이숙번 등에게 명해 국문(鞫問)하게 하고, 말하기를, "중국(中國)과 결혼하는 것은 나의 소원이나, 염려되는 것은 부부가 서로 뜻이 맞는 것은 인정(人情)의 어려운 일이고, 또 반드시 중국의 사자(使者)가 끊이지 않고 왕래하여 도리어 우리 백성들을 소요(騷擾)하게 할 것이다. 옛적에 기씨(奇氏)가 들어가 황후(皇后)가 되었다가 그 일문(一門)이 남김없이 살육되었으니, 어찌 족히 보존할 수 있으랴? 군신(君臣)이 일체가 된 연후에야 나라가 다스려져서 편안해지는 것이다. 지금 조박 등이 사사로이 서로 모여서 이 같은 큰일을 의논하고, 과인(寡人)으로 하여금 알게 하지 않았으니, 내가 누구와 더불어 다스리겠는가? 하물며 내가 황엄에게 세자가 이미 장가들었다고 분명히 고했는데, 오히려 추후(追後)해서 고칠 수 있는가?"
《太宗恭定大王實錄》 권13.
원 세조(元 世祖: 쿠빌라이 카안)는 우리에게 의제(儀制)는 본속(本俗)을 따를 것을 허락하였고, 고황제(高皇帝: 홍무제)께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성교(聲敎)를 하도록 하시었으니, 이것은 동교(東郊)의 땅(동국)이 진실로 복리(腹裏: 내지)에 비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世祖惠莊大王實錄》 권3.
황제의 성지(聖旨)에 있어서도 몽골복속기를 거치며 그 위상의 변화가 확인되는데, 고려가 몽골제국의 속령이 되면서 몽골 카안의 권위가 고려의 내정이 깊숙이 관여하는 권력질서가 형성되었다. 이는 공민왕이 속국관계를 재편한 이후에도 그 영향이 남게 되는데 위화도 회군을 통해 최영을 숙청하고 우왕을 폐위한 권신들이 홍무제에게 창왕의 즉위를 우왕의 선위에 따른 것임을 새기려고 부단히 노력하면서 창왕의 친조 논의를 한 것이나 그 외에도 공양왕의 친조 논의, 홍무제의 조선 국호 채택, 양녕대군의 조현(朝見)과 혼인 논의 등이 있다. 이는 몽골복속기를 거치면서 고려에게 명 황제권이 요금대의 황제권에 비해 강화되었음을 시사한다. 다만 몽골복속기 몽골 황제권이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고 강력한 정치적 권위를 발휘했던 것과 달리 공민왕의 속국 관계 재편 이후 고려-조선에서 명 황제권은 고려-조선 내부의 정쟁, 혁명, 반란 등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그 영향력을 발휘했을 뿐이다. 또한 조선은 황제의 성지를 유리하게 활용하여 중국의 제후가 아닌 외신제후로서의 근거를 확보하고 이를 자기신념화하는 방향으로 더욱 나아간다.
영락~선덕년간 조선이 7차례 명에게 은밀히 조공한 114명의 조선인 공녀의 존재, 홍무제와 이성계의 혼인 논의, 1차 공녀의 정략결혼적 성격, 한반도의 주기적 조공 관행의 정착, 철령 이북의 쌍성총관부 고지에 대한 분쟁, 고려인에 대한 과거정식 적용, 명 황제가 속국 산천에 직접 제사를 지낸 것 등도 카안 울루스의 유산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처럼 한중관계사에 있어서 몽골복속기는 강력한 조공책봉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하나의 변혁기다. 몽골복속기를 거치며 고려-조선의 국왕은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아야만 그 지위가 유지될 수 있었으며 조공 및 봉삭을 의무적으로 행해야 했다. 이러한 관계는 양측이 형석적인 측면이 강한 의례적인 관계를 넘어서 법제적, 수직적 관계를 명시하기에 이른다. 고려전기까지와 달리 책봉을 받지 않고 조공을 행하지 않는 군주는 1897년까지 한반도에서 완전히 연상할 수 없게된 것이다. 따라서 고려의 요청을 계기로 주변국들에 대해 (특히 고려-조선에게) 관료제적 질서를 의례에 포함시킨 명대의 한중관계와 고려 전기까지의 한중관계상 조공책봉을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본다.정동훈(2019). "明과 주변국의 外交關係 수립 절차의 재구성 ― 이른바 ‘明秩序’ 논의에 대한 비판을 겸하여 ―". 《明淸史硏究》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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