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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당 왕조는 탁발국가인가? 한족국가인가?
    카테고리 없음 2019. 11. 23. 22:13

    최근 학계에서는 당 제국을 '탁발국가'로 보는 시각과 기존의 '한족국가'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탁발국가'라는 용어는 탁발 씨족을 중심으로 융합된 다양한 종족들의 실체를 축소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며 서위북주와 동위북제 그리고 수당제국을 호계(胡系) 왕조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다.

    I. 북위 효문제의 한화정책의 실체

    대흥안령 산맥 북동부 알선동(嘎仙洞) 인근의 대선비산(大鮮卑山) 일대에서 36부 99씨족을 통솔하던 탁발(拓跋) 씨족의 수장 추인(推寅)은 남쪽으로 서진하여 대택(大澤: 후룬 부이르)에 도달하였고, 그 후손 힐분(詰汾)은 흉노의 고지(내몽고 중부)로 세력을 옮겼다. 이후 이들은 대(代)와 북위를 건설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탁발의 수장들은 흉노(匈奴, Xwn)·강(羌)·갈(羯)·고차(高車)·유연(柔然)·오환(烏桓)·저(氐)·모용(慕容)·걸복(乞伏)·단(段) 계통 등의 튀르크어족 및 몽골어족의 종족들을 흡수함으로써 탁발선비(拓跋鲜卑)로 거듭나게 되었다.

    알선동석실축문의 사진. 해당 내용의 번역은 이 글을 참조하라.

    북위 효문제는 장락 풍씨 일족이자 북연의 황실의 후손인 문명태후(明馮太后) 풍씨(馮氏)1)가 사망하여 임조청정(臨朝聽政)이 끝나자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되는데, 탁발선비라는 출신성분에 대해 컴플렉스가 있었던 그는 평성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탁발선비로 대표되는 호인(胡人)들의 본적을 하남낙양(河南洛陽)으로 설정함으로써, 서진의 계승을 표방하고 한-위-서진-동진-북위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는 호인들의 풍습을 한인들의 풍습으로 대체하고, 호한통혼을 장려하였으며, 118개의 호성(胡姓)을 중국식 단성으로 개명할 것을 명령했다. 

    그의 정책에 따라 호인들은 씨족명과 호어나 불교식 이름은 중국식 성씨와 이름으로 대체되고, 본적 또한 하남낙양인으로 변경된 것이 많았으며, 당시 한인들의 봉분형 무덤 등을 차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효문제 본인도 호인들의 음식, 호인들의 습속을 지닌 순행 등을 즐겼으며, 순행을 하느라 자신이 제시한 비전을 제대로 실천할 여력이 없었다. 효문황제조은비간묘문(496) 등의 금석문을 분석해보면 많은 호인들은 호성을 단성으로 개성하는 효문제의 정책을 상당 기간 동안 따르지 않았다. 토욕혼씨(吐谷渾氏)·하약씨(賀若氏)·우문씨(宇文氏)·모용씨(慕容氏) 등은 씨족명의 유지를 인정받았고, 《위서》 관씨지(官氏志)에서 누락된 혁련씨(赫連氏)·저거씨(沮渠氏)·호연씨(呼延氏)·곡사씨(斛斯氏)·부몽씨(夫蒙氏)·동제씨(同帝氏)·준몽씨(儁蒙氏) 등의 수많은 씨족들로 구성된 대부분의 중하급 관료와 일반 호인들은, 훗날 일부가 스스로 한성으로 개명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에는 호성을 계속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전히 본적지를 평성 일대로 생각하던 호인들도 있었다. 30세 미만 조정내 호인들에 대한 호어금지, 호복(胡服) 금지 등의 정책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북위 후기에도 여전히 호인들의 습속이 유지되었다. 더나아가 영황후 호씨(靈皇后 胡氏)를 비롯한 안정 호씨 일족은 한인임에도 불구하고 호화되어 불교를 숭상하고 문란하게 행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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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명태후 풍씨를 비롯한 장락 풍씨 일족은 북연의 황실로서 북위 황실과 외척관계를 맺었다. 북연의 군주였던 풍발의 아우 풍소불의 무덤이, 묘제가 한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영역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모용선비의 습속을 따르고 있는 점에서, 북연의 풍씨 황족은 사실상 호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II. 북위의 붕괴와 새로운 호계(胡系) 왕조의 등장

    효명제 때 평성 일대의 육진에는 가뭄이 들었는데, 이때 유연의 칙련두병두벌가한(敕連頭兵豆伐可汗) 아나괴(阿那瓌)가 회황진(懷荒鎭)을 약탈하고 도주하자, 굶주린 진민들은 식량 요청을 거부한 진장(鎭將) 우경(于景)을 참살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또한 불과 몇년 전 황제에게 항복했던 아나괴의 횡포를 제압하지 못한 북위 조정의 취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남에 따라 이듬 해 옥야진(沃野鎭)의 진민 파육한발릉(破六韓拔陵)이 진왕(眞王)을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켜 이른바 육진의 난(六鎭之亂)이 발발한다. 그해에 고평진(高平鎭)의 진민 혁련은(赫連恩)이 파육한발릉에 호응하여 호침(胡琛)을 고평왕(高平王)으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고, 진주(秦州)에서는 상규(上邽)의 성민 막절태시(莫折太提)과 그 아들이 염생(念生)·천생(天生)이, 525년에는 유현진(柔玄鎭)에서 두락주(杜洛周)가, 526년에는 정주(定州)에서 회삭진(懷朔鎭)의 진민 선우수례(鮮于脩禮) 및 갈영(葛榮) 등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6진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

    프랑스 파리의 세르누치 동양 예술품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북위 기병 석상.

    육진의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거병한 갈계 호인 유격장군(遊擊將軍) 이주영(尒朱榮)은 육진과 사주(肆州)·항주(恒州)·병주(幷州) 일대의 피난 및 패잔 호인·안신(雁臣) 호인 등을 흡수하고 사주와 병부 등에 자립한 독자적인 군벌로 성장하였다. 그는 관농을 휩쓴 고평진민 묵기추노(万俟醜奴)의 반란을 비롯한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는 한편 찬탈의 마음을 품었다가 528년 효문제의 조카인 효장제를 황제로 옹립하고 태원왕(太原王)에 봉해진 뒤 하음의 변(河阴之变)을 일으켜 영태후 호씨와 황제 원조(元釗) 등 2천여 명의 관리를 참살했으며, 자신의 딸 이주영아(尒朱英娥)를 효장제에게 시집보내어 황제의 장인이 되었다. 이듬 해에는 북해왕(北海王) 원호(元顥)와 연합하고 낙양을 침공한 양나라 진경지(陳慶之)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렇듯 이주영은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북위를 안정화시켰으나 동시에 정권을 장악한 권신이 되었다. 그는 마음대로 인사권을 휘두르면서 호인들을 하남의 관리로 임명하려 했는데, 이에 반감을 품은 효장제는 3년간 치밀한 계획을 세운 끝에 530년 태자의 출산으로 이주영을 유인하여 그와 그의 아들 이주보제(尒朱菩提) 등 30여 명을 궁내에서 참살하였다.

    이주영의 사후 이주도율(尒朱都律)・이주조(尒朱兆)・이주천광(尒朱天光)・이주중원(尒朱仲遠) 등이 원엽(元曄)과 절민제 등을 옹립하여 사태를 수습하던 중, 회삭진(懷朔鎭)의 진민으로 두락주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이주영에게 귀부했던 고환(高歡)은 현지 발해 고씨를 포섭하고 이주씨정권을 이간질하여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이주씨정권은 절민제로 하여금 그를 발해왕 및 기주대중정(冀州大中正)으로 봉하여 회유했으나 무시당했다. 532년 관농 지방을 장악한 이주천광이 고환을 토벌하기 위해 관농에서 이탈하자 그들의 수하였던 무천진(武川鎭) 출신의 하발악(賀拔岳)과 그 부장 우문태(宇文泰) 등이 흥기했다. 한편 고환이 절민제와 원랑(元朗)을 모두 폐위하고 효무제(孝武帝)를 옹립했으나 534년 효무제 마저 그의 횡포에 불만을 품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도리어 역습당해 우문태 통치하의 장안(長安)으로 도주하였다. 결국 고환은 효정제를 새로이 옹립했다. 이에 따라 암살당한 하발악의 인재유산을 물려받은 우문태와 고환이 화북을 각각 관서(關西)와 관동(關東)으로 반분하여 서위-북주, 동위-북제 시대를 개창하게 된다.

    하발악의 세력을 흡수한 우문태는 부병제의 모태를 마련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각각 우문태·이호(李虎)·후막진숭(侯莫陳崇)·양충(楊忠), 조귀(趙貴) 등으로 대표되는 무천진(武川鎭) 출신의 호한인, 산동의 태원 왕씨와 농서 이씨로 대표되는 한인과 갈·강·저·선비 등으로 구성된 관서 지방의 호우(豪右), 기타 북진무장(北鎭武將)을 합작시켜 이른바 관롱집단(關隴集團)이라는 최상층 귀족집단을 형성했다.

    1940년대 화북성에서 발굴된 선비 전사의 석상.

    우문태는 '호성재행(胡姓再行)'을 실시하여 효문제의 한화 정책 등의 이유로 중국식 단성을 사용하는 호인들에게 새로운 성씨나 본래 성씨를 다시 부여했다. 이때 호인 양충의 일문(一門)은 보륙여씨(普六茹氏)를, 《송서》 유원경전(柳元景傳)에 기록된 이초고발(李初古拔) 이래 이씨를 자칭한 것이 확인된 호인 이호에게는 대야씨(大野氏)를 사성했다. 또한 한인에게도 호화의 일종으로써 호성을 사성하고 작위와 봉지(封地)를 내렸다.

    한편 동위의 고환의 아들인 고양(高洋)은 효정제에게 황위를 선양받아 북제를 건국했는데, 북제의 호인 지배층은 선비인으로 행동하면서 선비적인 것[鮮卑特質]을 중시하였다. 한인 안지추(顔之推)가 590년을 전후로 북제 생활에 대해 기록한 《안씨가훈(顔氏家訓)》을 보면, 북제의 한인 관리가 자신의 17살 된 아들이 출세를 잘할 수 있도록 선비어와 비파(琵琶) 타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북제 황실은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북위 전후부터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던, 상업자들이 많아 상호(商胡)라 지칭되기도 한 서역 소그디아나의 소무구성호인(昭武九姓胡)의 음악과 신앙 등의 문화를 애호하게 된다. 북제 황실은 소그드 문화에 과하게 심취하면서 황제는 수양(壽陽)이 함락됐을 때도 안일하게 악삭(握槊) 놀이를 하거나, 서역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을 왕과 관리로 임명하는 과오를 저지르기까지 했다.

    III. 수·당, 호계(胡系) 왕조의 연장선

    443년에 주조된 북위의 미륵불상.

    북주 선제의 장인이자 정제의 외조부인 양견은 양충의 아들로, 훗날 정제에게 황위를 선양받아 수(隨)라는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 남조를 멸망시킨 뒤 호한체제를 완성하고 중국 역사상 몇없는 조밀한 행정력을 보유한 통일왕조를 건설하게 된다. 양견의 아명은 나라연(那羅延)이었는데, 그것은 나라야나(Nārāyaṇa)의 한역으로, 천상의 역사(力士)로서 불법의 수호하는 화신을 의미한다. 그의 아들 수 양제의 아명은 아마(阿摩), 양용(楊勇)의 아명은 현지벌(睍地伐: Gāṇḍīva)이었다. 우문화급(宇文化及)이 양제를 살해하자 공제에게 황위를 선양받아 당(唐)을 개국한 대담하고 노련한 지휘관 고조 이연의 아들 이건성(李承乾)의 아명은 비사문(毗沙門: Vaiśravaṇa)이었고 당 고종의 아명인 치노(雉奴)는 늑대를 뜻하는 몽골어(činu, chono)와 친연성을 가진다. 북조의 호인들은 자신의 이름을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인물과 개념 등 각종 인도어 혹은 호어로 지었는데, 수당 황실 인사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5세기 이전에 활동한 당 고조의 조상 이초고발(李初古拔)·이매득(李買得)은 물론 이호의 형과 아우도 각각 기두(起頭)와 걸두(乞豆)라는 호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한성 이씨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이는 승려 법립(法琳)이 당 태종의 면전에서 "탁발의 달도가 당에서 말하는 이씨이며, 곧 폐하의 이씨이니 이는 곧 농서 (이씨)의 유파가 아니라는 것이옵니다.(琳聞拓拔達闍唐言李氏陛下之李斯即其苗非柱下隴西之流也)"라고 말하며 '음산귀종(陰山貴種)'이라 비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호어인 달도(達闍)를 한역한 것일 뿐이었다.

     

      

    타이페이 국립 고궁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당 태종 이세민의 입상.

     《구당서》 손복가전(孫伏伽傳)에 따르면 고조 이연이 어릴 때 주위의 벗[友朋]이 모두 '편발(編髮)'을 하고 있었다고 말하였으며, 수말 당 태종과 충돌했던 반란 수장 단웅신(單雄信)은 당 태종의 아우 이원길(李元吉)을 '호아(胡兒)'라고 비난했다. 또한 당 태종은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 당시 이원길을 죽이고 그의 부인 양씨(楊氏)를 소왕비(巢王妃)로 삼았고, 당 고종은 부친인 당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를 황후로 삼기도 하였으며, 당 현종은 자신의 서자 이모(李瑁)의 왕비 양귀비를 후궁으로 삼았다. 당 태종의 장자 황태자 이승건(李承乾)의 경우, 시위들과 민가의 소와 말 등을 훔치고 달아나 먹었으며, 아예 쾩튀뤼크(Kök türük)의 언어와 의복을 사용하며 카간(kaɣan)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당 황실 인사들의 생활과 행적 등을 검토해보면 성당(盛唐) 때까지도 호계 왕조의 성격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자어류》에 따르면 남송의 유학자이자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는 "당의 원류는 이적에서 나온 까닭에 규문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唐源流出於夷狄故閨門失禮之事不以爲異)"라고 하였다.

    선비인의 모습을 묘사한 벽화.

    《구당서》 에 따르면 622년 당 고조가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당 태종에 대해 한인 식자[讀書漢]들에게 교습을 받은 후 그리되었다며 불평하였는데, 이는 일찍이 북제 문선제가 한학(漢學)에 능통했던 황태자 고은(高殷)이 '한가성질(漢家性質)'을 얻어 자신과 닮지 않았다며 불만을 표출한 것과 비슷한 사례이다. 또한 당 고조 ~ 고종은 국가사업을 통해 선세의 흔적과 정체성을 지우고 서량 황실 농서 이씨의 후손이라는 새로운 서사시와 계보를 확립했다. 이러한 일들은 당초 당 황실의 반투명한(translucent) 정체성의 실체를 반증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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