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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몽골주의와 몽골민족주의를 통해 보는 대청제국이 몽골에게 남긴 유산카테고리 없음 2020. 7. 18. 03:40
1606년, 누르하치에게 '쿤더런 칸'이라는 존호를 올리는 엉거더르 타이지와 칼카 5부의 사신들을 묘사한 《만주실록》의 삽화. 17세기 초, 누르하치(Nurgaci)가 명의 요동 지역을 정복하면서 후금은 본격적으로 명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대두하게 되는데, 후금은 그와 동시에 반(反) 차하르(čaqar) 연대 및 무력을 동원한 복속이라는 방식으로 코르친(qorčin)과 연합을 맺고, 내칼카(qalq-a) 5부를 지배할 수 있었다. 누르하치에 이어 후금의 군주가 된 홍 타이지는 차하르와의 경쟁 과정에서 연대한 몽골계 세력들을 지휘하면서 이들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군령을 적용할 수 있는 지도(tutelage)체제를 마련했다. 그는 차하르 릭단 칸(ligdan qa'an)의 병사 이후 릭단 칸의 부인인 난난 태후(囊囊太后) 및 수타이 태후(苏泰太后)와 그 아들 어르커 콩고르(erke qonggor) 어저이(ejei)를 수습하면서 최종적으로 막남 몽골에 대한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홍 타이지는 1636년 4월, 후금이 간접지배 중인 외지 몽골(tulergi golo-i monggo) 16개 세력의 49명의 수장들로부터 정통성을 마련하여 새로운 존호와 연호 그리고 국호를 선포했다. 이 해 10~11월 청제국은 나이만(naiman), 아오한(aoqan), 바린(barin), 자루드(ǰarud), 두르번 커우커드(dörben qeüqed), 아루 코르친(aru qorčin)과 코르친, 옹니우드(ongniu'ud)에 부용한 카라 처릭(qara čerig), 무우밍안(muuminga'an), 우라드(urad), 잘라이드(ǰalaid), 두르버드(dörbed), 고를로스(gorlos) 등 몽골계 세력들을 50가(家)를 1니루(niru)로 편제하고 니루 장긴(niru-i janggin)을 임명했으며, 대학사 히퍼(hife)와 몽골아문승정(monggo jurgan-i aliha amban) 니칸(nikan)을 파견해 호구를 조사하고 몽골 수장들과 업무를 논의했다.
숭덕~순치연간에 이르러 귀화성 투머드(tümed)와 차하르 왕공 그리고 수니드(sönid) 등의 막남 몽골제부를 두고 막북의 외칼카와 청제국이 대치하면서 양자는 점차 조공책봉을 매개로 하는 속국(Dependent State) 관계를 수립했다. 강희연간 청제국과 준가르(zöün-γar) 경쟁하는 과정에서 청은 쿠쿠누르(köke nu'ur; 칭하이)와 티베트 지역으로 진출하고, 러시아제국과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준가르와 함께 외칼카를 고립시켰다. 1691년, 강희제는 돌론누르(dolon nu'ur)에서 회맹을 열고 막남 몽골의 49기(旗) 왕공들과 젭춘담바 후툭투(rje btsun dam pa hu thug tu)와 투시예투 칸을 비롯한 칼카 왕공들을 소집했다. 이때 칼카는 청에게 복종을 맹세했고 강희제는 이를 계기로 이번원 상서 아라니(arani)와 시랑 부얀투(buyantu) 등을 파견해 칼카를 기(旗)로 편제하고 유목지를 지정했으며, 이듬해에는 칼카 자삭(jasak)들에게 인신(印信)을 지급했다. 이때 칼카는 좌익의 투시예투 칸 외 3명의 수장들과 세첸 칸(sečen qa'an)부는 각각 북로(北路)와 동로(東路)로, 우익의 자삭투 칸(ǰasaγtu qa'an)부는 서로(西路)로 재편되었다.
강희연간까지 칼카는 라마(티베트)・우울드(ööld: 오이라트)와 함께 내몽골 49기에 비하면 외지의 직공지국(職貢之國, Tributary State)로 여겨졌다. 그러나 옹정연간에 이르러 《대청회전(大淸會典)》 이번원조에서 칼카와 오이라트를 직공국과 기미(覊縻: Vassal)로 지칭한 구절을 삭제되었다. 옹정제는 외몽골에 울리아수타이장군(烏里雅蘇台將軍)과 부장군 등의 제도를 통해 칼카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청해와 티베트 일대의 반란을 진압하여 1725년 청해지역의 호슈드(qošud), 초로스(čoros), 토르구드(torγoud), 호이드(qöid), 칼카 등의 오이라트-몽골계 세력을 차간노민한기(察罕诺们汗旗)를 비롯한 29개 기(旗)로 편제하고 서녕판사대신(西寧辦事大臣; 欽差辦理青海蒙古番子事務大臣)을 통해 지배했다.처링(čering, 車凌)은 두르버드의 3 처링 중 한 명으로, 1753년 3천여 명을 이끌고 청으로 귀부하였다. 그는 이듬해 건륭제를 접견하고 호쇼이 친왕(和碩親王, hošo-i cin wang)으로 봉해졌다. 1755년 다와치(dawači)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군공을 세워 좌익의 맹장 및 두르버드 한으로 임명되었다.
갈단 처링이 사망하며 준가르제국에서 내분이 발생하자, 1753년 준가르제국의 두르버드부가 청으로 귀부하여 준가르 원정에 참전했다. 두르버드를 이끈 3 처링(三車凌)과 11명의 일족은 청으로부터 홉도(qobdo) 지역에 유목지를 분배받고 자삭으로 임명되었다. 준가르제국에 복속되었던 사얀 튀르크계(Sayan Turkic) 언어를 쓰던 유목민 집단들도 몽골-오이라드 세력들과 마찬가지로 청제국에 의해 맹기제도가 적용되었다. 강희연간 신속했다가 1757~58년의 반란과 함께 토벌당한 뒤 탕누 우량하이는 5기(旗) 46~7좌령으로, 1762년에 복속된 알타이 우량하이는 좌우익으로 나뉘어 7기(旗)로, 1757년에 복속된 알타이 누르(altai nu'ur) 우량하이는 소속 좌령을 2기(旗)로 편제됐다.
1630년대 볼가 강 유역으로 이주했던 토르구드와 호슈드는 토르구드부의 우바시 한(ubaši xān)의 주도로 1771년 준가리아(Dzungaria)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신강(ice jecen)의 이리 지역에 유목지를 분배받고 각각 9기(旗)와 4기(旗)로 편제되어 이리장군(伊犁將軍, ili jiyanggiyūn)의 지배를 받았다.
몽골리아, 준가리아, 칭하이, 닝샤, 간쑤, 후룬버이르 등의 몽골계 세력들을 정복한 청제국은 왕공들과 수장들을 중심의 세력을 맹기제로 재편하고 추가적으로 세분화하면서 기존 수장층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켰다. 청제국이 유목지를 배분하여 몽골-오이라드계 세력들을 구속하자, 평민들도 새로이 지역화된 공동체에 포함되었다. 청제국의 관료체제에 의해 투먼(tümen)과 오톡(otog) 그리고 울루스 제도가 붕괴되면서 왕공귀족과 평민들이 같은 공동체를 이룬 지역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맹기는 몽골계 집단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이자 식별 단위가 됐다. 19세기에 이르면 몽골인들은 칭기스 일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대울루스들의 역사 대신 각자가 속한 기(旗; qošun)의 역사만을 기록했다.
청제국의 강건성세의 마지막을 장식한 건륭제는 제국의 구성원들에게 문화적 지표에 따른 정체성을 부여하고 자신이 그들에 맞게 여러가지 배역을 맡고자 했다. 그는 기인들에게 그리했던 것처럼 몽골계 집단들도 제도화하여 정체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제국에 의해 유목지에서의 게르 생활, 티베트불교, 수렵, 계절별 제사 등이 몽골인의 문화로 규정되었으며, 투머드의 타이지 사간 서천(saγan sečen)이 기록한 어르더니 톱치(Erdeni-yin tobči, 1662)를 번역한 《흠정몽고원류(欽定蒙古源流, Hesei toktobuha enetkek tubet monggo han sai da sekiyen)》를 간행,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欽定外藩蒙古回部王公表伝, Hesei toktobuha tulergi monggo hoise aiman-i wang gung sai iletun ulabun)》을 관찬하여 청제국 속 몽골인의 역사를 정립하고자 했다. 건륭제의 정책은 19세기 몽골인들이 울루스를 대체하여 (청제국하의) 땅을 의미하는 오론(oron)이라는 용어를 채택하도록 만들었으며, 북경에 거주하던 팔기몽골인들에게는 몽골과 그 위치를 동일시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다.
19세기 중후반부터 내우외환이라는 진통을 겪은 청제국의 몽골 정책은 자희신정(慈禧新政)의 시작과 함께 격변했다. 특히 1906년 무렵부터 시작된 정치개혁은 외번몽골인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미 18~19세기에 한인 상인들이 불교사원을 중심으로 진출하여 외번몽골 사회는 한인 상인들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고 말았는데, 19세기 후반부터 제국의 혼란과 함께 한인 농민들의 이주가 폭증하자 청 정부는 외번몽골을 한인 상농민들에게 개방할 것을 법적으로 허용해버린 것이다. 일반 몽골인들은 한인들의 상농업 거점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새로운 방침으로 인해 몽골 땅(mongγol oron)의 유목민들의 위기감과 사회적 불만이 증대된 탓이었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몽골 땅에 정주 중인 유목민들에게 위기의식과 함께 범민족주의 물결도 들이닥친 것으로 생각된다.악왕롭상초이지냠단잔왕축(Agvaanluvsanchoijinyamdanzanvanchüg, 1869~1924), 그는 제8대 젭춘담바 후툭투로서, 훗날 대몽골국 신정부의 황제[khaan)으로 추대된다. 1869년에 캄(ཁམས)의 리탕(ལི་ཐང་) 지역의 관리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는 제13대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로부터 활불 젭춘담바의 환생으로 공인된 투시예투 칸의 아들 어시도르지(ཡེ་ཤེས་རྡོ་རྗེ, 1635~1723)의 8번째 환생으로 인정되어 1874년 외번몽골의 후레 지역으로 이주했다.
청 황실 주도하에 이루어진 자희신정은 10여 년만에 의무교육 보급, 근대적 신식군 창설, 근대적 재정, 헌법 제정, 근대적 법률체제 마련 등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으나, 섭정 순친왕의 우유부단함과 황실 중심의 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신사층과 량치차오를 비롯한 입헌주의자들의 반발까지 맞닥뜨렸다. 외번몽골의 왕공과 종교계급은 황실과 조정이 내외적으로 강력한 압박을 받고 있으며 제국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인지한 것 같다. 1911년 7월, 젭춘담바 후툭투와 할하 왕공들 그리고 조수투맹(ǰosutu-yin čiu'ulγan) 하라친(qaračin) 우기(右旗) 출신 하이샨(qayišan)을 비롯한 몇몇 내몽골, 서몽골인들은 복드(bogd) 산에서 제국의 붕괴에 대비하기 위한 은밀한 회의를 가졌다. 이들은 러시아제국의 니콜라이 2세(Николай II)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다. 8월 중순, 상트페테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에 도달한 내외몽골대표단은, 만주 황제에게 복종하는 몽골인들은 200여 년 간 평안할 수 있었지만 최근 한인 관료들이 국정을 혼란케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몽골 땅을 한인들에게 개방해준 정부의 새로운 정책이 성사되면 자신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파괴할 것이기에 참을 수 없다는 내용의 서한을 러시아 외무부에 올렸다.
10월 10일 후베이성 우창(武昌)에서 혁명파의 봉기하여 후베이 신정부를 수립하자 이를 기점으로 40여 일만에 14성(省)이 이에 호응하여 독립(=自決)을 선언했다. 신해혁명이 일어난 것이었다. 11월 28일 할하 왕공들은 시국회의를 개최했으며 젭춘담바 후툭투는 조서를 내려 독립을 호소했다.대체로 세상에 끝이 없는 것은 없다. 청의 이러한 상황은 모두 때가 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여러 몽골인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독립(獨立)을 이룩하고 황교(黃敎; 겔룩빠)를 부흥하여 외세의 지배와 고통으로부터 해방할 시간이 도래했다.후레에서 촬영된 암반(amban) 산도와 관리들. 11월 30일 후레(khüree) 임시정부는 흠차쿠롄(후레)판사대신(欽差庫倫辦事大臣) 정백기 몽골인 산도(san do)에게 몽골인들이 주축이 되는 대몽골국(ikh mongol uls)을 건국하여 젭춘담바 후툭투를 한(khaan)으로 즉위할 예정임을 통보했으며 12월 1일, 독립과 함께 대몽골국 건국을 선포했다. 임시정부는 내몽골 6맹(盟), 투머드, 우울드(오이라드), 후룬버이르의 바르가(barga), 다리강가(dariganga), 알라샤(alashaa), 간쑤 등지의 몽골인들에게 건국을 통보하고 귀부를 촉구했다. 12월 29일 젭춘담바 후툭투가 복드 한(Bogd
khaan)으로 추대되자, 2년에 걸쳐 내몽
골 총 49기(旗) 중 36~38기와 차하르, 탕누 우량하이, 훕스굴 우량하이, 알타이 우량하이, 두르베드, 자흐친(zakhchin), 토르구드, 호슈드, 다리강가, 바르가, 카자흐(kazakh) 등의 몽골-튀르크계 집단들이 귀부 청원해왔다고 전한다. 이들의 청원서에는 한인들로부터 위협받는 몽골민족의 전통생업과 종교에 대한 보호 의지가 강조되어 있다.
1912년 5~8월, 복드 정부는 무력을 동원해서 홉드통합전쟁을 통해 홉드를 병합했다. 이 과정에서 몽골국의 주축을 이루는 할하는 물론, 바르가, 차하르, 탕누 우량하이, 두르버드, 토르구드 등이 참여했는데, 이를 통해 몽골-오이라트 그리고 우량하이인들의 몽골통합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문서상 기록과 달리 내몽골 왕공들은 대몽골국 건국 통보 직후 이에 긍정하고 희망을 갖고 있었지만, 대저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다. 내몽골 통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던 복드 정부의 내몽골인들은 지휘관이 되어 노골적으로 복드 정부에 대한 지지를 거부한 시린골맹(šili-yin γoul čiu'ulγan) 맹장 양산(楊桑) 등은 물리력을 동원해 귀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300여 년간 내몽골을 유연하게 통치하면서도 분열시킨 청의 지배는 내몽골을 아우를 수 있는 범몽골주의 창출을 억제했고, 러시아제국의 개입으로 복드 정부의 내몽골 통합전쟁은 죄절되었다.담바도르지(Дамбадорж, 1898~1934).
1920년대 사회주의 혁명과 함께 수립된 몽골정부는 몽골통합의지를 다시 내보인다. 1920~21년 몽골 지도자들은 건국 직후 귀부 청원을 보내온 탕누 우량하이가 청제국의 몽골에 속했음을 근거로 코민테른과 소비에트 지도자들에게 탕누 우량하이의 편입을, 1911년 러시아에서 몽골대표단과 몽골인의 장래를 논한 라마 악왕 도르제브(Agvaan Dorjev)의 출신인 부랴트에서 할하로의 통합과 이주 움직임이 나타나자, 부랴트인들의 몽골국 이주를 허용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 중앙위원장 담바도르지 정권은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을 받은 내몽골 민족주의 운동에 대해 재정적, 교육 지원은 물론 무기까지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나 코민테른의 개입과 1928년 당대회에서 지도부가 소련 유학파로 교체되면서 또다시 좌절됐다.
청제국이 몽골각부를 지배하면서 이들에게 주입한 규범화된 문화적, 지리적 인식은 첫번째, '몽골어를 하는 사람들(mongγol qeleten)'로서 '위대한 아이막 울루스'이나 '대원(大元)을 이루고 있다고 의식하면서도 칭기스 원칙 준수 여부를 두고 서로를 외국(qari) 혹은 외적(qari daisun)으로 타자화하고 적대하던 오이라드와 몽골의 수장층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몽골민족으로 묶을 수 있는 바탕을 제공했다.1) 두번째, 몽골어를 하지 않으면서도 외번몽골의 관할하에 청제국의 지배를 받은 우량하이인(투바인)과 일부 카자흐인2) 또한 20세기 범몽골주의의 범주에 동참하거나 포함되었다. 세번째, 독립적 주권국가(independent sovereign state) 몽골에 접경하는 '내몽골'을 아우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토대를 마련했다. 1990년대 초, 소련해체와 몽골민주화 등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몽중러 각지의 몽골인들 사이에서 재차 민족주의 열풍이 불었다. 몽골어와 몽골종교의 보전은 물론 복식, 예술, 축제 등 대부분의 문화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근래 몽골의 몽골인들은 청대의 복식을 배척하고 몽골제국기 복식을 전통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1). 칼미크 스텝의 바가 두르버드(baga dörbed) 출신으로, 아무르사나의 자손임을 자처했다고 전해지는 자 라마(ja lama)는 1910년대 복드 정부의 홉드해방전쟁에서 군공을 세워 홉드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중국과 몽골로부터 홉드에 오이라드 분리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홉드의 왕공귀족들은 그의 급진적인 러시아식 개혁과 독재 행태에 불만을 터트렸고, 1914년 홉드주재러시아영사관의 명령으로 카자키(казаки́)에 의해 체포되었다. 석방 이후 세력을 모아 고비사막 동부에서 활동하지만 1921년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담딘 수흐바타르(Damdin Sükhbaatar)의 사주로 암살당했다.
2). 1760년대 1900년대까지 많은 카자흐 유목민이 국경지대를 넘나들었으며, 일부는 이리와 타르바가타이 그리고 알타이 지역에 정착하여 이리장군, 타르바가타이 참잔대신(塔爾巴哈臺參贊大臣), 울리아수타이 장군, 알타이 판사대신(另设阿尔泰办事大臣) 등의 지배를 받았다. 야쿱 벡의 군대를 증국번이 진압하고 신장성(新疆省) 건성한 이후 몽골의 자삭 제도를 본떠, 카자흐 각 부에 왕공, 버이서(beise), 타이지(taiji) 등을 설치하고 유목민들을 통치하였다. 광서말년, 상당한 알타이의 카자흐 유목민들이 진시(镇西; 바리쿤 카자흐 자치현), 무러이(무러이 카자흐 자치현), 우루무치(ürümqi)와 수이라이(绥来; 마나스 현) 등의 산악지대로, 몇몇은 칭하이로 이주했다.이평래(2009). "1912-1913년 복드 정부의 내몽골 통합 시도와 좌절". 《중앙아시아연구》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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