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
조공-책봉 관계는 종주국-속국 관계와 다를까? - 일국사적 시야의 문제점 -카테고리 없음 2021. 10. 5. 07:27
최근 블로그 방문량이 갑작스레 늘어 찾아보니 부흥 카페에서 필자의 게시글이 댓글창에¹ ² 거론되어 유입 인원이 증가한 것이었다. 대체적으로 필자를 비롯한 아마추어층이나 대중적, 그리고 학계 일각은 여전히 '조공'이라는 형식의 동일함을 실질의 동일함으로 일반화하는 문제점과, 일국사적 관점에 기반한 특수성 부각이라는 문제점을 앉고 있다. 혹자는 명청대 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종주국과 속국의 개념으로 보는 논자들에 대하여 "이러한 견해는 중국과 조선 사이에 존재하는 이해의 충돌이나 의견차이에 의한 갈등을 간과한 것이다"고 하면서, "한반도와 중원의 국가 사이에 맺은 조공책봉관계가 강대국의 결정을 약소국에서 수용하는 일방적인 관계로 해석될 수는 없다."고 하였다.³ 적어도 명청대 중국과 조선을 강대국과 약소국으로..
-
청 제국의 국제질서 속 조선의 위상카테고리 없음 2021. 1. 15. 21:49
1637년 이래 '조공책봉관계'를 수립한 청 제국과 조선의 관계에 대해 근래 한국 학계에서는 미국의 신청사 연구 기류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면모들을 조망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조선의 위상에 대해 특수하다거나, 피상적으로는 '모범'이라고 설명한다는 것이며, 그 배경에는 무력에 의한 복속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2020년 7월, 독일 베를린 훔볼트포럼(Humboldt Forum) 한국관 전시 방안을 두고 담당 큐레이터가 당시 "문화재 수집가 등이 조선을 중국의 '속국'이라고 인식하고 조선의 문화재를 구하는데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라고 설명한 것이 대중적 파장을 일으키고, 지원을 약속한 한국국제교류재단이 8월 말 박물관 측에 지원을 연기할 것을 통보한 사건에서 보이듯이 한국 대중은 '조..
-
조공-책봉은 동양의 보편적 외교 관계인가? - 명청대를 중심으로 -카테고리 없음 2020. 12. 25. 23:12
굳이 한중 네티즌 간의 분쟁이 아니더라도 한국인들 사이에서 종종 이슈가 되는 조선 왕조의 정치적 위상 문제에 대해 일부 국내외 사학자 및 대중의 일반적 인식은 조선의 위상인 '조공국(Tributary state)'은 '속국(Vassal state)'이 아니며, 이른바 '조공책봉관계'는 동양의 보편적 와교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조선의 조공 행위를 경제적 욕구가 추동한 동양의 보편적인 외교관계로 일반화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조공국'은 '속국'이 아닐까? I. 도식화 될 수 없으며, 중화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조공' 동양의 보편적 외교관계로 설명되는 조공은 주대 봉건제라는 기원을 갖는 유서깊은 외교 방식으로 설명되지만, 명대 이래 조공은 몽골제국의 교역망의 기조 위에 명과 상대국의 이해관계에..
-
병자호란의 결정적 원인이 청의 식량난이라는 속설에 대하여 - 홍 타이지를 중심으로 -카테고리 없음 2020. 12. 20. 15:44
명청교체기, 명 질서의 붕괴를 상징하는 병자호란은 2019년 전후로 새로운 연구 성과들이 제출되는 등 임진왜란에 이어서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와 함께 필자를 포함한 이른바 '역덕후'들 사이에서도 병자호란에 대한 논쟁이 활발해졌는데, 이 과정에서 출처불명의 와언들이 '최신 학설'로 둔갑되어 알려지고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청군 차병이 허위라는 주장과 함께 사료와 연구들을 단장취의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본다. 병자호란의 동인은 청의 경제적 문제인가 근래에 이른바 '역덕후' 집단 일각에서는 병자호란은 조선이 어떤 행보를 보였어도 일어났을 전쟁이라고 주장하면서 병자호란의 동인, 즉 핵심적인 계기를 소빙하기와 명의 무역 봉쇄 등에서 찾는다. 실제로 청은 이러한 연유로 경..
-
범몽골주의와 몽골민족주의를 통해 보는 대청제국이 몽골에게 남긴 유산카테고리 없음 2020. 7. 18. 03:40
17세기 초, 누르하치(Nurgaci)가 명의 요동 지역을 정복하면서 후금은 본격적으로 명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대두하게 되는데, 후금은 그와 동시에 반(反) 차하르(čaqar) 연대 및 무력을 동원한 복속이라는 방식으로 코르친(qorčin)과 연합을 맺고, 내칼카(qalq-a) 5부를 지배할 수 있었다. 누르하치에 이어 후금의 군주가 된 홍 타이지는 차하르와의 경쟁 과정에서 연대한 몽골계 세력들을 지휘하면서 이들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군령을 적용할 수 있는 지도(tutelage)체제를 마련했다. 그는 차하르 릭단 칸(ligdan qa'an)의 병사 이후 릭단 칸의 부인인 난난 태후(囊囊太后) 및 수타이 태후(苏泰太后)와 그 아들 어르커 콩고르(erke qonggor) 어저이(ejei)를 수습하면서 최종적..
-
17세기 대칸의 권위와 실체카테고리 없음 2019. 11. 14. 10:27
1229년 우구더이의 대관식을 묘사하고 있는 라시드 알딘(Rashīd al-Dīn)의 《연대기의 집성(Jāmi` al-Tavārīkh)》의 삽화. 우구더이(Ögödei)가 '칸(qan) 중의 칸'이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한 이후 쿠빌라이(Qubilai)에 의해 몽골제국 군주의 칭호로 확립된 '카안(qa'an/qahan/qaγan)'은 14세기 후반 제국의 붕괴 이후 사실 그 권위가 점차 희미해져 16세기 이후에는 점차 소멸되어갔다. 따라서 이후에 작성된 몽골문헌들은 칸과 카안을 구분하지 않고 전부 카안이라고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와치르바니(Vajrapāņi, 금강수보살), 16세기 투머트 알탄 칸 치세로 부터 몽골의 불교화가 이루어지면서 칭기스 칸은 불법을 수호하는 화신 중 하나인 와치르바니로 전락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