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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세기 대칸의 권위와 실체
    카테고리 없음 2019. 11. 14. 10:27

    1229년 우구더이의 대관식을 묘사하고 있는 라시드 알딘(Rashīd al-Dīn)의 《연대기의 집성(Jāmi` al-Tavārīkh)》의 삽화.

    우구더이(Ögödei)가 '칸(qan) 중의 칸'이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한 이후 쿠빌라이(Qubilai)에 의해 몽골제국 군주의 칭호로 확립된 '카안(qa'an/qahan/qaγan)'은 14세기 후반 제국의 붕괴 이후 사실 그 권위가 점차 희미해져 16세기 이후에는 점차 소멸되어갔다. 따라서 이후에 작성된 몽골문헌들은 칸과 카안을 구분하지 않고 전부 카안이라고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와치르바니(Vajrapāņi, 금강수보살), 16세기 투머트 알탄 칸 치세로 부터 몽골의 불교화가 이루어지면서 칭기스 칸은 불법을 수호하는 화신 중 하나인 와치르바니로 전락했다.

    다만 만두울(Mandu'ul)-다윤 칸(Dayun qa'an: 다얀 칸) 치세에 확립된 6투먼의 종주권은 그들의 직계인 차하르(Čaqar) 칸이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졌으나 그마저도 투머트(Tümed)의 알탄 칸(Altan qa'an)이, 그를 따르며 세력을 키운 뒤 금강수(Vajrapāņi)의 화신으로 여겨지던 칭기스 칸(Činggis qan)에 필적한다는 의미에서 와치르(wačir)의 칭호를 취한 할하 좌익의 아바타이 샌 칸(Abatai sain qa'an)과 그 후손들이 정치적 중심의 이동을 촉진시키면서 차하르 칸의 종주권은 더욱 추락했다.

    한편 16세기 후반 요동 훈강의 지류인 숙수후 강(Suksuhu bira: 蘇子河) 유역에서 누르가치(Nurgaci)가 점차 세력을 확장해 1588년에 건주위의 여진제부를 정복하고, 1593년에는 후룬 4국과 눈 코르친 등 9부 연합군의 공격을 격퇴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부터 다윤 칸의 5남 알추 볼라드(Alču bolad)의 다섯 손자가 각각 다스린 막남의 칼카5부 중 바야우트(baya'ud) 오톡의 수장 소닌 다이친 독신(Sonin daičin doksin)의 3남 로오사(Loosa)가 건주여진과 통교를 시작했다.

    1606년 누르하치에게 존호를 올리는 엉거더르 타이지와 칼카 5부의 사신들을 묘사한 《만주실록》의 삽화.

    1605년 소닌 다이친 독신의 장남으로 바야우트부의 수장이던 다르한 바투르(Darhan ba'atur)가 자신의 아들인 엉거더르 타이지(Enggeder tayiǰi)를 누르기치에게 보내어 우의를 다졌으며, 엉거더르 타이지는 이듬해에 칼카5부의 사신들을 인솔하여 누르가치에게 쿤더런 칸(kündelen qa'an)이라는 칸호를 진상했는데, 차하르의 릭단 후툭투 칸(Ligdan qutuγtu qa'an)은 자신과 충돌하던 누르가치가 일전에 칼카인들에게 칸호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 아무 문제나 트집을 잡지 않았으며, 바르수 볼라드 카안(Barsu bolad qa'an)의 아들이자 알탄 칸의 형제로 오르도스부를 분봉받은 군 빌릭 머르건 지농(Gün bilig mergen ǰinong)의 후손인 사강 서천 홍 타이지(Sγang sečen qong taiǰi)가 1662년에 저술한 《어르더니 톱치[Qad-un ündüsün-ü erdeni-yin tobči]》에서는 누르가치를 칭기스 칸의 정치적 계승자로 인정하고 있다. 즉, 이 사건은 어선 타이시(Esen taiši) 때와 같이 칭기스 계승 원칙(chinggisid principle)이 상당부분 해체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 태종 홍 타이지의 조복상

    그러나 1626년 누르가치가 등창으로 병사하고 그 뒤를 이은 8남 홍 타이지(Hong taiji)는 몽골인들로 부터 칸호를 진상받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1628년부터 반릭단 정세를 이용하여 코르친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고 기존의 바야우트와 자루트(ǰarud) 일부를 비롯하여 카라친(Qaračin), 아오한(Aoqan), 나이만(Naiman) 등을 자신에게 종속시켰으며 이듬해에 카라친, 나이만, 아오한, 칼카, 코르친(Qorčin)에게 후금의 규율을 따르게 하는 칙유를 내리고 겨울에는 나이만, 아오한, 자루트, 바린(Barin), 코르친을 동원하여 명의 화북을 4개월동안 약탈하는 동시에 기사의 변(己巳之變)을 일으켜 북경 조정을 패닉상태에 빠뜨렸다. 또한 1632년 봄에 차하르 원정을 통해서 서쪽의 투머트, 두르번 커우커트(Dörben keüked) 등의 병력을 규합하고 더욱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여 이들 또한 구속시켰으며, 1634년 4월에는 무우밍안부(Muumingɣan) 등의 귀순을 받아냈다.

    한편 후금의 차하르 원정으로 릭단 칸의 차하르 세력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릭단의 숙부 모키타트 타이지(Moqitad taiǰi)나 커식턴(Qesigten) 오톡을 비롯한 많은 차하르 세력들이 명이나 후금으로 이탈하기 시작했다. 결국 릭단 칸은 쿠커 누르(Küke nuur: 청해)로 서진을 단행했으나 얼마못가 천연두로 병사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과 함께 차하르 칸의 지위는 단절되었고 이에 따라 차하르부는 파편화되고 말았는데, 이러한 소식들은 허르마 지농(Herma ǰinong)과 만주시리 후툭투 라마(Manǰuširi qutuγtu lama) 등이 후금에 투항하면서 홍 타이지에게도 알려졌다.

    홍 타이지는 1635년 봄부터 10월 중순까지 도르곤(Dorgon), 사하랸(Sahaliayan), 요토(Yoto) 등으로 하여금 차하르의 유랑민들과 잔존세력들을 수습했고, 시라줄거에서 릭단 칸의 부인인 냥냥 태후를, 토리투에서는 수타이 태후와 아들 어르커 콩고르(Erke qonggor) 어저이(Ejei)의 투항을 받아냈다.

    대원전국에 새겨져 있는 '제고지보(制誥之寶)'

    도르곤은 수타이 태후와 어저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수타이 태후의 처소에 있던 토곤 터무르 우카가투 카안(Toγon temür uqaγatu qa'an)이 명군을 피해 북상하는 도중 응창부(應昌府)에서 분실되었다가 17세기 초 투머트 귀화성(歸化城, Yeqe ǰuu)의 거건 칸(Gegen qa'an: 順義王) 보쇽투(Bošoqtu)의 소유가 됐다고 전해지는 릭단 칸이 강탈한 대원 울루스의 전국옥새를 얻어 이를 홍 타이지에게 진상했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것으로 보이는 홍 타이지는 이듬해 1월 누르가치의 신위에서 "지금 그 보배의 도장(옥새)를 얻었습니다. 몽골을 모두 하나로 만듦을 마쳤습니다. 지금 오직 한(漢, nikan)의 나라만이 대적하고 있습니다.(te tere boobai doron be bahafi gajiha. monggo gurun be gemu uhe obume wajiha. te damu nikan gurun teile batalahabi.)"라고 고했고, 5월에 이루어진 천명을 받은 징표인 존호(amba gebu)를 받는 당위성 중 하나로 "몽골을 헌데 섞어서 하나로 만들고 옥새를 얻었음(混一蒙古, 更獲玉璽)"을 내세웠다.

    당시 존호 행사에는 홍 타이지에게 "대통(大道)을 세울 것(amba doro be toktobumbi)”을 요청한다는 명분으로 묵던(Mukden: 심양)에 방문한 몽골 16부 49명의 버이러가 참석했는데, 이들의 대표자인 코르친 투시예투 지농(Tüsiyetü ǰinong) 바다리가 몽골문 표문을 읽은 뒤 새로운 칸호를 바치고, 홍 타이지가 외번 몽골의 수장 14인을 책봉하면서 막남과 아루(Aru) 몽골 일부가 홍 타이지의 정통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하버드 대학교 옌칭연구소 도서관이 소장 중인 몽문 《어르더니 톱치》의 표지.

    사강 서천의 《어르더니 톱치》에서는 홍 타이지가 정권(törü)을 장악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홍 타이지가 막남과 아루 몽골의 정권 상당수를 자신의 아래에 두고 쿠빌라이 카안부터 토곤 터무르 카안까지 천명의 징표를 상징했다고 여겨진 전국옥새를 획득함으로써, 대청 황제가 1대에서 단절되지 않고 대대로 몽골계 종족들의 칸으로서 군림할 수 있게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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