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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제국기 '제주도 식민지 논란'에 관한 검토 - '합병'과 '식민주의' 그리고 '내부식민지'를 중심으로 -
    카테고리 없음 2022. 7. 12. 23:46

    모 학교에서 상기의 지문이 출제된 것을 두고 작년 10월부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나무위키에서도 '대한제국의 제주도 식민지설'이라는 문서가 생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 논의는 이 문제가 무엇을 참조했는지 제대로 검토조차 되지 못한 채 각자만의 결론에 도달하고 상대를 모독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을 뿐이었다. 필자는 구글링을 통해서 이 지문이 어떤 자료를 참조했는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해당 지문의 출전은 홍기돈(2017). "근대 이행기 민족국가의 변동과 호모 사케르의 공간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 ≪바람 타는 섬≫을 중심으로". 《한국언어문화》 64집으로 짐작된다. 홍기돈은 제주도 출신의 문학비평가로 1996년에 중앙대학교에서 "김수영 시 연구"로 문학석사학위를, 2003년에 "김동리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한 인물이다. 해당 논문의 초록을 보면, "제주는 세종 27년(1445) 명실상부하게 대한민국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광무 1년(1897)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제주 등 식민지의 존재를 제국 성립의 근거로 꼽았는 바, 이는 제주가 조선의 내부 식민지로 운영되었던 흔적을 드러낸다. 제주가 호모 사케르의 공간인 예외 상태에 처해졌던 까닭은 이로써 말미암았다."고 하면서 제주도를 '(내부)식민지'로 규정하고 있다. 그 근거는 '성주(星主)'⋅'왕자(王子)' 등으로 지칭된 탐라의 토착 지배층이 1402년 각각 좌도지관(左道知官), 우도지관(右道知官)으로 격하되었으며, 1445년 두 직제가 모두 폐지되어 명실상부 영토화 되었으나, 제주도와 4군 6진이 '조선'이라는 국가 체제로 편입된 것이 곧 기존의 내지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홍기돈은 제주의 목축업 위기와 이른바 '우마적(‘牛馬賊)' 사건 그리고 출륙 금지령을 예시로 들고 있다.

    I. 탐라국에서 제주로


    5세기, 탐라의 수장은 백제로 부터 은솔(恩率)이라는 관작을 제수하거나, 이후 어느 시점에서 좌평(佐平)을 수직받았다. 7세기에 탐라국왕(耽羅國王)은 신라에 칭신하여 속국(屬國)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 제국에 조공하거나, 일본에 탐라사를 파견하여 '대을상(大乙上)'의 관위를 제수하기도 했다. 신라는 어느 시점부터 탐라국주의 장남에게 성주(星主), 차남에게는 왕자(王子) 등의 작위를 내려주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러한 일종의 종주권(Suzerainty)이 탐라 내부에 어느정도로 작동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탐라는 10세기 초반, 신라의 통치질서가 재편되면서, 고려 왕조에 공물을 바치며 관계를 형성했다. 신라에 이은 고려 또한 938년에 탐라 태자의 입조를 계기로 그 기득권에 성주, 왕자 등의 작위를 부여했다.

    1011년에 탐라국은 고려에 군현(州郡)의 예에 따라 주기(朱記)를 내려줄 것을 청하여 일종의 '귀순주(歸順州)'가 되고자 하였다. 탐라국은 고려 팔관회에서 송, 흑수, 탐라, 일본 등과 동렬로 놓여 여진과 마찬가지로 '번토(蕃土)', 즉 종속 정치체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이 종속 관계는 11세기 중반을 전후로 점차 규범화 및 정례화되기 시작했는데, 1029년, 고려 조정은 탐라의 태자를 세자로 격하하였고, 1052년에는 탐라국이 바치는 세공의 액수를 귤 100포자로 지정하였다. 결정적으로 이 무렵부터 탐라의 지배층은 성주나 왕자가 교체되면, 즉각적으로 고려 조정에 수직을 요청하여 추인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11세기 후반부터는 탐라에 고려의 구당사(勾當使)가 파원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무렵 '대마도구당관(對馬島勾當官)'의 존재도 확인되나 그가 사자를 보내는 주체였다는 점에서 탐라구당사와는 본질적으로는 다르다고 봐야한다.

    인종대 중반에도 확인되는 탐라구당사의 존재를 탐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이 정기적이었든 단편적이었든 간에 '외국'의 대리기관이 자국에 상주하였던 것이다. 구당사가 고려 본국과 신장(申狀) 등의 방식으로 소통하지만, 조정에 보고하는 주체 기관이 외국인 내지 귀화인에 대응하였던 예빈성(禮賓省)이었기 때문이다. 1105년에 탐라국은 고려에 의해 군(郡)으로, 이후에는 현으로 재편되었다. 그 과정에서 탐라현령 및 탐라현위가 파견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실제로 26석 10두, 20석을 지급받는 대상으로 규정되어, 지방 수령을 매개로 하는 행정력이 발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군현화 과정에서 폐단이 발생하면서, 무신정권은 탐라의 잦은 반란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1153년 탐라현(耽羅縣)의 도상(徒上)이 일행을 이끌고 방물을 바쳤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탐라의 기득권은 고려 조정의 관할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고종대에 이르러 고려 조정은 탐라현을 '제주(濟州)'로 개칭하고 외관도 부사(副使)이나 판관(判官)이 설치되는 등 군현의 요소가 상당히 이입되었다. 그렇지만 13세기 후반 고려 지식인의 눈에도 탐라는 '남만(南蠻)'이었다. 행정력의 이입이 곧 양자간의 의식체계 및 해당 지역의 정치·사회·경제의 내지화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12세기 초 칭기스 칸(činggis qan)의 흥기와 함께 중앙유라시아의 광역적 통치질서가 전면적으로 재편되자, 고려 남쪽의 궁벽진 곳에 위치한 섬나라도 그 영향을 피하지 못했다. 탐라의 위상과 사회는 몽골군의 고려 도래와 함께 크게 변모하게 된다.

    몽골 복속기, 제주도에는 몽골과 한인 등으로 구성된 진수군이 주둔하거나, 다루가치총관부(達魯花赤摠管府)가 설치되는 등 일본 원정과 물자 제공 등의 이유로 몽골의 행정력이 발휘되었다. 충렬왕의 호소 끝에 제주도에 대한 고려 조정의 주권을 부분적 보장받을 있었으나, 제주도를 말 사육장으로 삼은 원 제국은 목축 사업을 위한 관리를 직접 파견하거나, 원 황제가 만호부의 임면권을 유지하는 복합적인 양상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카안 울루스의 물질문화와 목축기술이 제주도에 이입되어 '탐라'는 몽골 황제와 제왕 등에게 '낙토(樂土)'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른바 '원명교체기' 광역적 통치질서가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홍무제는 원 제국의 유산을 자신이 계승했음을 표방했다. 일찍이 홍무제가 요구하지도 않았던 위계관계를 먼저 제안했던 공민왕은, 1372년 7월, 홍무제에게 먼저 제주도의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봉강(封疆)'을 인정받고자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제주의 말을 공마하겠다고 하였다. 즉, '상국'에게 도의적 책임을 강조하여 그들의 권력을 제한하고자 한 것이다.

    홍무제가 고려와 북원의 내통을 의심하면서 '조공'과 '책봉' 등 이른바 '조공책봉관계'의 제반 의례를 통해 고려에 구조적 지배를 관철하고자 할 때, 공민왕이 제안한 '공마'는 고려 왕조를 길들이기 위한 좋은 수단이 되었다. 홍무제는 또다른 수단으로 육로를 막고 해로로만 '조공'할 것을 요구해놓고서는 '공마'가 도달하지 못한 것을 두고 고려를 힐난했다. 게다가 1374년에는 아예 '공마' 2000여 필을 골라서 바치라고 명령했다. 이는 제주도에 거주하는 몽골인들의 반발을 야기할 수 밖에 없는 조치였다. 명사의 압박에 공민왕은 사실상 대안이 없었다. 이미 원 제국이라는 배후가 사라진 시점에서 공민왕이 제주도의 몽골인(목호)들을 비호해줄 이유가 없던 것이다. 게다가 홍무제도 일전에 고려의 제주도 토벌을 독려한 바 있었다.

    공민왕은 제주도를 토벌하여 이른바 '목호의 난'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그 사실이 명 제국에 보고된 것은 공민왕이 시해되고 이미 몇 해가 흐른 뒤였다. 1379년, 관계 개선을 위한 조건으로 매년 막대한 양의 금·은·포·마를 조공하면 고려에 대한 의심을 거두어줄 것이라는 홍무제의 제스처에 고려가 난관에 부딪히고 손해를 감수하며 호응하자, 1385년 5월 홍무제는 제주도에 대한 고려의 지배권을 다시 한 번 공인하였다. 그러나 비록 원 제국의 붕괴에 따른 광역적 통치질서 재구획으로 완화된 감은 있지만, 원대 이래 제주 마필을 몽골인들이 관할한 전례의 연장선상에서 고려와 그에 이은 조선 왕조는 명말까지 매년 제주의 말을 50필 단위로 조공해야했다.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여칭(呂稱) 등이 북경에서 돌아와서 아뢰기를, "황제께서 잔치를 내려 주어 후하게 위로하고, 권규에게 구마(廐馬) 3필, 단(段)·견(絹)을 각각 8필씩 하사하셨습니다 또 궐내의 환관에게 듣기로는, '황제가 장차 흉노(匈奴: 몽골)를 친히 정벌하려고 천하의 병사 100여 만 명을 징발하여 이미 상도(上都)로 보냈고, 또 어떤 요동 사람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제주의 마필은 전에 원(元)에서 방목(放牧)하던 것이니, 중국으로 옮겨 설치하기를 청하옵나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太宗恭定大王實錄》 26권

    조선 초, 조선 조정은 제주도의 목축업이 유지되기를 바라면서 모순적이게도 농본주의에 입각해 제주도를 농업 사회로 재편하는 내지화를 추진하였다. 농업 사회로의 재편, 곧 내지화 정책은 결국 목축업의 입지가 위축되는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었다. 아울러 조선 조정은 홍무제가 죽었음에도 언제든지 명 황제가 마필을 요구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충청도, 전라도, 경기도 등에 경차관을 파견하여 제주 풍토의 땅을 탐색하여, 마침내 진도나 강화도 등에 목장을 신설하고자 했다. 이때 본토에 새로이 공급할 말들 역시 제주도에서 찾으니, 그 수는 2천여 필을 넘을 정도였다. 1420년, 세종은 명사가 제주 마필의 숫자를 물어볼 것을 우려하여, 큰 말은 왜구로 인해 종자가 절멸하고 단지 작은 말만 남아있을 뿐이라고 대비하라고 명하기도 했다.

    아울러 조선 조정은 교역에 있어서도 부분적인 금지라는 제한을 가하였고, 결국 내지화라는 내적 요인과 명 제국과의 위계관계라는 외적 요인 등이 맞물리면서 제주도의 핵심 산업인 목축업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로 인해 생계 곤란을 겪게 된 제주 목자들은 이제 우마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우마를 도축하여 건육포나 가죽 등을 판매하여 생계슬 유지했다. 1430년 전후로 우마 도축이 급증하자 조정은 마필을 유지하기 위해 우마를 도살하는 자에게 형벌을 내리고자 하였다. 조정에 의해 우마를 도살하는 자들은 이제 '우마적'이라는 죄인이 되었다. 게다가 이들 중에는 제주의 풍속에 따라 우마를 관습적으로 도축하던 사람들까지 포함돠었다. 조선 조정은 우마적과 그 가족들을 회령과 여연 등지로 사민하여 평안도를 개척하고자 한다. 이른바 평안도에 대한 '정착형 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 정책에 제주인들도 활용함으로써 제주의 인구 과잉 문제를 해소하고자 한 것이었다.

    내(세종)가 지금 이를 생각하니, 제주는 멀리 바다 섬에 있어서 그 백성들이 예의도 알지 못하고, 또 안정된 마음도 없어 남 몰래 산림(山林)에 숨어서 소나 말을 도둑질해서 잡아 먹기 보통이니, 이것은 더러운 옛 풍속에 물들은 것이라, 어찌 육지에서 예의를 아는 백성들과 같이 해서 법으로 아프게 다스리겠는가. 지금 옮긴 자들이 멀리 살던 곳을 떠나서 어버이를 생각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회포와 원망하는 말들이 반드시 화기를 불러서 상하게 할 것이므로, 적도(賊徒)들을 찾아 물어서, 그 소원이 그대로 육지에 살고자 하는 자는 소원대로 살게 하고, 본토에 돌아가고자 하는 자는 본토에 돌아가기를 허락하여 수심과 원망을 끊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世宗莊憲大王實錄》 72권

    세종은 토풍에 젖어서 자기 소유의 우마를 잡아 제사하고 그 고기를 먹은 어리석은 백성들은 우마적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남의 우마를 훔쳐 도축한 이들을 제외하고 자기 소유의 우마를 도축한 이들의 경우는 죄를 사하여 주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신료들은 그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도 몇차례의 제의 이후 더이상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고자 하지 않았다. 이후 우마적에 대한 처벌은 보다 체계화되어 남의 우마를 도축한 우마적과 그 가솔은 평안도 등지로 강제 이주되어 농민으로서 그곳을 개척해야했다. 우마적이 해로로 호송되는 가운데 일부는 표류하거나 침몰하는 등 사고가 발생하였고, 조정의 지배에 순응한 제주의 백성들은 그들대로 생계 위협에 뒤이은 흉년과 전염병으로 유랑하였다. 16~17세기에 많은 제주 백성들이 섬을 이탈하여 유민으로 떠돌기 시작하자, 조정은 1629년에 제주 유민을 출륙을 막는 '출륙 금지령'을 선포하였다.

    여러 달이 지난 뒤 송동지는 다시 서울로 진상을 가게 되었다. 진상을 마치고 돌아올 때 광청고을 허정승댁을 찾아들어 해가 지자마자 광청아기 방으로 달려갔다. 뜻밖에도 아기씨는 송동지 아이를 잉태한 사실을 말하며 옷깃을 잡고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다. 그때 시절이 육지 여자는 제주에 못 가고 제주 여자는 육지에 못 갈 때였다. 송동지는 아기씨가 울음 끝에 도포자락을 놓은 틈을 타 문 밖으로 내달아 포구로 나와서 배 밑에 들어앉았다. 광청아기가 불룩 나온 배를 이끌고 포구로 나와 송동지 배를 찾는데 무정한 사공이 발판다리를 당겨버렸다. 아기씨는 감태같은 머리를 풀어헤치며 물로 풍덩 떨어져 구름 녹듯 녹고 말았다.

    현용준·현승환 역(1996). 제주 안사인본 "광청아기본풀이".《한국고전문학전집 29: 제주도 무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pp. 408-415.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 조정은 제주도를 내지와 다름없는 지배질서에 편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운이 쉽지 않았던 탓에 대동법의 시행 과정에서 제주도의 현물 진상은 유지되었다. 아울러 "제주는 속국과 마찬가지여서 체임시의 진상을 마치 제후가 조공하는 법처럼 해온 지 오래되었다(濟州如屬國 故遞任進上 若諸侯朝貢之法)"는 인식에서 드러나듯이 제주의 진상을 일종의 봉건적 정례로서 '조공(tributary)'처럼 간주하는 경향도 있었다. 18세기 후반 정조는 제주와 내지가 다름 없다는 인식을 내비치면서 선왕들이 그러한 이유에서 진상물종의 부담을 줄여주었다고 어필하였다. 이때부터 조정에서는 민간 교역의 활성화를 유도하여 제주의 곡물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함으로써 폐단만 남은 관영사업을 대체하고 기근 문제를 타개하고자 했다. 결국 출륙 금지령을 통해 제한되던 제주와 육지 사이의 상업에 부분적인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육지 상인이든 제주 상인들 역시 별다른 장애 없이 왕래할 수 있었고, 제한 기간 역시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19세기 초 '양제해(梁濟海) 무고 사건'¹ 당시에도 진상을 알 수 없었던 조정은 그 사건 등을 계기로 1823년 유명무실화된 출륙 금지령을 폐지했다. 그러나 조선의 군주들이 탐라빈흥과(耽羅賓興科) 등의 우대나 감면 정책을 펼치면서 제주도가 내지와 다름없다고 어필하는 그 인식 저변에는 제주가 '절도(絶島)'로 교화(敎化, 유교화)의 정도가 뒤떨어졌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것은 "만약 학문으로서 가르쳐 그 마음을 열지 못하면 영원히 풍속 바꾸는 것을 기약치 못할 것(若不敎以學文 以開其心 則永無移風之期)"이라는 말로 표상된다. 바꿔 말하면, 그들에게 낯설 외부성이 이해관계에 맞게 법·교육·경제 체제를 점진적으로 강요하여 지배를 확립하자는 것이다.

    현종대 제주가 속국에 비견된 데서 보이듯이, 조선 문인의 제주 인식을 살펴보면 완전히 합병되었지만 유교적 시각에서 야만으로 표상하여 자신들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요소로서 제주의 모습이 선명해진다. 고려 후기 지식인의 눈에 '남만(南蠻)'이었던 제주는, 조선의 지배층에게는 목숨을 걸어 도해해야 도달할 수 있는 척박한 '절도(絶島)'로 '왕화(王化)'가 닿지 않아 "육지에서 예의를 아는 백성들과" 달리 "더러운 구풍"을 간직한 야만의 공간이었다. 그들에게 제주는 삼성(三聖)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거나, 영주(瀛洲)라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적이고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그들이 중화로 부터 문명(유교)을 선취했다는 기저의 인식 속에서 본토와는 사뭇 이질적인 요소들(지역성)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렇게 제주를 교화·계몽(유교화) 되지 않은 이들로 설정함으로써, 자신들이 '중화'를 전유할 수는 없지만 '동국(東國)'·'소중화(小中華)'로 표상되는 그에 버금가는, 비교우위에 설 수 있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누구보다 빠르게 중화의 문명화를 선취하여 문명과 야만의 사이에 자신들을 위치시키고 그 자신감 하에 주변부를 재구획하였다. 그 결과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내부의 제주(탐라)를 야만의 공간으로 타자화하여 분절하고, 외부의 쓰시마(대마주)와 여진(번호)를 교화의 대상으로 포획함으로써, 국왕의 덕화를 빛나게 하는 한편, 스스로를 또다른 지배자로 선언할 수 있었다.

    II. 전통에서 근대로의 이행에서 연속되는 '내부 식민지'

    전 승지(承旨) 이최영(李㝡榮)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 폐하의 훌륭한 덕(德)과 대단한 업적으로 오늘날 자주 독립의 시대를 만나서 조(詔)와 칙(勅)으로서 이미 황제의 제도[皇帝之制]를 행하고 있는데, 아직도 군주(君主)의 지위에 있습니다. 군주와 황제는 바야흐로 지금 천하에 통용되는 규례이므로 살펴보면 그 법은 한 가지입니다마는, 본국(本國)의 신하와 백성들이 좁은 소견으로 모두 원하는 것은 제(帝)라고 칭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 까닭을 말씀드리면, 대체로 황(皇)이라는 글자와 제(帝)라는 글자의 뜻은 모두 크다는 것을 일컫기 때문입니다"라고 칭제를 상소하였다.
    《高宗太皇帝實錄》 35권

    유학(幼學) 권달섭(權達燮)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 지금 자립(自立)의 위치에서 조칙(詔勅)으로 명령하는 것과 연호를 정하는 것은 이미 황가의 제도(皇家之制)를 시행한 것인데 아직도 군주의 자리에 계십니다. 군주와 황제는 현재 한 세대를 놓고 볼 때 그 뜻은 같지만, 본국(本國)의 신하와 백성들의 좁은 소견으로는 제(帝)라고 칭하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자주(自主)의 ‘자(自)’자와 독립(獨立)의 ‘독(獨)’자의 뜻은 전적으로 자기의 의사에 따라 혼자 마음대로 하는 데에 있지 여기에 물어 보고 저기에 의거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자주적인 우리나라는 마땅히 황제라고 불러야 하는데, 어째서 크게 보배로운 황제의 자리에 임어하지 않으십니까? 삼가 성상의 뜻을 알 수 없으나 혹시 나라의 체통을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아직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高宗太皇帝實錄》 35권

    1897년 5월부터 9월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신료들은 고종에게 '칭제'를 주청하였다. 그 이유는 '자립' 내지 '자주'와 '독립'을 행하고 있고, 이미 황제국 체제를 일부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서구 국제법 질서에서의 '자주(Sovereignty)'·'독립(Independence)' 개념과 중화 질서의 예제 속 황제 제도와 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적 관념이 착종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² 이미 1883년 무렵부터 고종은 종주국인 청 제국을 제외한 대외 외교에서 '대군주(大君主)'를 자칭하거나, '대조선국 대군주(大朝鮮國 大君主)'라는 인장을 사용하는 등 황제 제도의 용어들을 늘려나갔다. 이는 조선이 각국과의 우호 통상 조약 체결 과정에서, 황제 제도의 용어를 무의식적으로 채택하는 상대국과 격식을 맞추는 동시에, 청 제국과의 관계에서 '속방(屬邦, Dependent state)'의 위치에서 체현한 자주 의식이었다.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정개혁의 일환으로 조중장정을 폐기하면서 '속방' 지위는 1차적으로 탈각되었다. 이에 따라 1895년 1월, 조선의 내각은 '주상 전하'를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로, '왕대비 전하"를 '왕태후 폐하(王太后陛下)'로, '왕세자 저하'를 '왕태자 전하(王太子殿下)' 등으로 격상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년 3월,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국은 조선국이 완결무결한 자주독립의 나라임을 확인하며 무릇 조선의 독립 자주 체제를 훼손하는 일체의 것, 예를 들면 조선국이 청국에 구실하는 공헌, 전례 등은 이 이후에 모두 폐지 한다(淸國ハ朝鮮國ノ完全無缺ナル獨立自主ノ國タルコトヲ確認ス因テ右獨立自主ヲ損害スヘキ朝鮮國ヨリ淸國ニ對スル貢獻典禮等ハ將來全ク之ヲ廢止スべシ)"고 선언하면서 이른바 '상방지권(上邦之權, Suzerainty)'³이 최종적으로 탈각되었다. 이제 완전(full)' 내지 '절대적(absolutely)' '자주·독립(Sovereign·Independent)' 국가의 명을 얻은 조선은 중국과의 '대등'이라는 목적의식을 추구할 수 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년 10월 12일 고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서를 반포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용흥하시는 처음에 미처 여도 써 밖에 개척한 땅이 더 넓어 북으로 말갈의 지경을 다하시매 치혁과 염사가 나고 남으로 탐라의 나라를 거두시매 귤유와 해착이 공 하는지라 폭원 사천 리에 일통의 업을 세우시며 예ˑ악ˑ법ˑ도는 당ˑ우를 조술하시고 산하가 공고함에 복을 우리 자손 만세반석의 종에 드리우셨거늘 오직 짐이 부덕하여 마침 어려운 제회를 당하였는데 상제께서 권고하사 위태함을 굴려 편안함을 들리시고 홀로 서는 기초를 창건하여 스스로 주장하는 권리를 행하게 하시니 군신과 백성과 군오와 시정이 한 말과 한가진 소리로 규혼 제유하여 장 수십 번을 올려 반드시 제호를 추존코자 함에 짐이 사양한자 여러 번이로되써 사양 할 수 없어 음력으로 금년 구월 십칠일에 하늘과 땅에 제사를 백악산 남편에서 고하고 황제위에 나아가며 천하의 호를 정하여 가로되 대한 (大韓)이라 하고 이해로써 광무 원년을 삼고태사와 태직을 고쳐 쓰고 왕후 민씨를 책하여 황후를 삼고 왕태자로 황태자를 삼아 오직 이에 경명을 비이하고 비로소 거전을 칭하고 이에 역대 옛 일을 상고하여 특별히 큰 사를 행한다
    우리 태조(이성계)께서 용흥(龍興)하시는 처음에 땅 밖으로 땅을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일통의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지권(自主之權)을 행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光武) 원년으로 삼으며, 종묘와 사직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 민씨를 황후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高宗太皇帝實錄》 36권

    고종의 반포문에서 보이는 칭제의 근거도 서구 국제법과 중화질서의 예제 해석이 하나의 텍스트에 착종되어 나타나고 있다.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 즉 동북면과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 즉 제주도를 거두어 공납(貢納)을 받았다는 것은, 곧 도(圖)를 중심으로 모든 제후들이 군왕을 받들어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는 '대일통'이 구현됐다는 것이다. 나아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독립의 터전을 세워 자주지권(自主之權)도 행하게 되었으므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삼고 칭제하였다. 조선 지배층의 에피스테메 속에서 '대한'이라는 '(황)제국'은 비로소 '대청'이라는 '(황)제국'과 대등해졌다. 막상 국제법 체계에서 군주의 호칭이나 국가의 체제는 '주권 국가(Sorvereign State)'라는 전제하에 무엇이든 상관이 없었지만, 국제법 질서와 중화 질서의 착종으로 고종은 '칭제'를 통해 '자주·독립(Sovereign·Independent)'을 완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제주도가 이질적인 '척지(拓地)'의 범주에서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다. 반포문에서는 제주도(탐라국)의 공납을 공후(公侯)가 천명을 받은 군왕을 받들어 조공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 현종대 제주도의 현물 진상을 제후의 속국(屬國)으로서 조공의 법도[朝貢之法]를 행한 것에 비유한 어느 신료의 인식과 궤를 같이 한다. 물론 '척지'를 곧바로 '식민지'로 치환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조선 조정이 제주도를 행정적으로 편입하였음에도, 세부적인 입안이나 저변의 인식에 있어서 제주를 '내지'와 달리 문치가 미쳐 실현되지 못하는 야만(몰유교)의 공간으로 타자화한 것으로 볼 수는 있다. 서구의 '자주(Sovereignty)'·'독립(Independence)' 개념을 체득하고 청 제국의 종주권이 실제적으로 탈각된 시점에서 스스로 반야만의 위치에서 '제후'로 표상하여왔던 "또다른 지배자"는 '황제'로 표상되는 절대적 지배자로 거듭난 것이다.

    중심부에 의한 문명과 야만이라는 폭력적인 호명은 한국의 '병합' 이후에는 유교가 아닌 근대적 시각으로 대체되고 지속되었다. 일본의 식민지(Colony)로 전락한 조선(반도)의 지식인들에게 제주도는 '전설'적이고 '신비'한 그리고 '신성'한 '꿈'의 공간으로 표상되었다. 과거 조선의 문인들이 유교적 문치가 미치지 못한 것을 두고 제주를 야만(몰유교)의 공간으로 설정하였다면, 이들은 문명(근대성)을 선취했다는 우월감 속에서 전근대성(지역성)을 간직하고 있는 제주도를 자의적으로 상상하고 명명하였다. 가령 제주인을 여성적 타자화한 것이 그것이다. 그들에게 제주도의 '남성성'은 그곳에 민족적 신성성이 부여될 때만 나타났다. 즉, 조선(반도)의 지식인들은 일본(내지)의 문명(근대성)으로 표상되는 식민성을 내면화하고 내부에서 이질적인 요소들을 많이 찾을 수 있었던 제주도를 또다른 야만(식민지)로 재구획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비교군을 세움으로써 자신들의 문명화(근대화)가 이들의 수준을 훨씬 능가한다는 그 우월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홍기돈은 조르조 아감벤의 담론을 빌려 조선시대 제주인의 처지를 "'벌거벗은 생명을 법적⋅정치적 질서로부터 배제하는 동시에 포섭하면서 그것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로 정의되는 「예외 상태」를 떠오르게 한다"고 이야기 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제주도는 어느 시점에서 조선 왕조에 의해 행정적으로는 완전히 '합병'되었지만, 실질적으로 홍기돈이 말한대로, "외부와 내부의 구분이 불가능한 비식별역에 노출"돼 있었다. 그들이 법질서의 외부에 있는지 아니면 내부에 있는지를 말하는게 불가능한 것이 제주도와 그곳의 백성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중심부가 관할 및 행정적인 정책과 별개로, 수백여 년 간 끊임없이 제주라는 주변부를 '야만(식민지)'으로 표상하고 타자화하여 정치적·사회적 지배자의 위치를 확보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이상의 개괄적인 검토를 볼 때, 제주도는 11세기부터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본국에 의하여 점진적으로 완전한 '합병'으로 귀착되고 있었다. 하지만 제주도는 본국의 영토 일부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왕 '속국(屬國)'으로 여겨지거나 그 집단은 '남만(南蠻)'으로 경멸되었다. 생각컨대, 고종의 반포문이나 "이것은 더러운 옛 풍속에 물들은 것이라, 어찌 육지에서 예의를 아는 백성들과 같이 해서 법으로 아프게 다스리겠는가"라는 세종의 발언 등은 홍기돈의 주장대로, "아감벤은 예외 상태를 창출하여 '벌거벗은 생명을 정치 영역에 포섭하는 것이야말로 ― 비록 은폐되어 있지만 ― 주권 권력 본래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바, 제주와 평안도⋅함경도 지역에 가해진 예외 상태가 어떠한 이데올로기 위에서 구축되고 작동하였는가가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말대로 제주도는 '식민지(Colony)'인가?굳이 '식민지'라는 용어로 제주도를 설명하자면 고중세적 '식민지'에서 '내부 식민지(Internal Colony)'로의 점진적 전환이라고 하겠다. 제주도는 본래 '외국'이었고 한반도와의 위계질서는 종속 관계에서 완전한 '합병'으로 귀착한 것이기 때문에 두 개념 가운데 하나로 전 시기를 포괄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시기를 '대한제국'으로 한정한다면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13도제 개편에 따라 제주군이 전라남도에 귀속되는 1896년 8월부터 군제(郡制)를 폐지하고 도제(島制)로 재편되는 1915년 5월에 이르기까지 제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완전한 합병 상태였지만, 여전히 중심부의 역사·지리·정치·문화 등의 유기적 사고에서 '내부 식민지'로서 '상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행정적인 '합병'을 강조하게 되는 모든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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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사건을 '양제해의 모반(梁濟海謀反)'이라고 지칭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 사설을 참조.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34432

    서거 200주년, 의인(義人) 양제해를 생각한다 - 제주의소리

    “제주백성들이여 어찌해서 양제해의 영혼을 한 번도 제를 지내지 않는가? 어찌해서 그의 고혼을 한 번도 위무하지 않는가?(濟民者何不一祭於其魂撫存其孤乎)” 이 글은 의 저자이자 조선 후기

    www.jejusori.net

    2). 흥미롭게도, 조선 왕조가 구축한 황제 제도와 제후 제도의 이항대립적 인식 구조는 21세기에도 대한민국에도 잔류하고 있다. 이는 한국인들의 일본관에서 주로 확인할 수 있는데, 1910년 왕조 국가가 일본 제국의 '식민지(Colony)'로 전락하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내세운지 100여 년이 흐른 시점에서 조선 왕조가 정립한 황제 제도↔제후 제도 이항대립의 관념을 일본의 천황(天皇, Emperor) 호칭에 기형적으로 투영하고 있다. 일본에 대한 역사적 감정을 이런 형태로 표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데다가 지엽말단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사설을 참조. https://m.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5130300025

    [역사와 현실] 천황인가, 일왕인가

    칼럼을 쓰다보면 신문사에서 일본 천황을 곧잘 일왕으로 고친다. 일본의 임금을 무어라 부르면 ...

    m.khan.co.kr


    3)
    . 전통시대 중국에서 '종주권(Suzerainity)'과 안정적으로 대응하는 개념이 부재하였지만, 1880년대 청조의 집행자들은《문명국들의 근대 국제법(Das moderne Volkerrecht der Civilisierten Staten)》, 즉 《공법회통(公法會通)》이 한역되면서 '상방지권(上邦之權)'이라는 용어로 안정적으로 번역할 수 있었다. 혹자는 중국의 '조공책봉관계'에서 '종주권'에 상응하는 권한이 부재하였다고 하지만, 필자는 오스만 제국의 종속 관계를 지칭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종주권' 개념이 오히려 명·청 제국과 조선과의 관계에 더 적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관해서는 필자의 다른 글 참조. https://chinua.tistory.com/m/13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 아니었을까? - 종주권과 속국 그리고 조공국 등 개념사를 중심으로 -

    속국은 전근대 자료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며, 노태돈·정병준도 전근대의 속국과 근대의 속국 개념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즉 현대에서 속국이라 하면 종속국이나 비자주적 보호

    chinua.tistory.com


    4). 민국 때 편찬된《신학제역사교과서(新學制歷史敎科書)》 상책(1923)은 "중일전(청일전쟁) 후 조선왕은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였다. 국호는 대한이라고 하여 독립된 나라임을 분명하게 드러냈다(中日戰後 朝鮮王 自稱皇帝 國號大韓 表明是獨立的國)"고 하였다. 이것은 청말민초 중국인들이 중화 질서와 국제법 질서가 교차하는 당시 동아시아의 언어적 콘텍스트(linguistic context) 속에서 동서양의 관례가 착종된 언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미 고종의 '칭제건원' 시점에서 농상공부 협판(農商工部協辦) 권재형(權在衡)이 상소를 올리기를 "신은 예전에 정위량(丁韙良)이 번역한 《공법회통(公法會通)》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제86장에는 '국주(國主)가 꼭 황제의 호칭을 가져야만 황제의 나라들과 평행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자주(自主)의 왕국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그런데 자주의 왕국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낡은 견해를 미련스럽게 고집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갑오 경장(甲午更張) 이후로 독립의 명은 있으나 독립의 실은 없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아서 백성들의 의혹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臣曾讀丁韙良所譯《公法會通》 其第八十六章曰 國主非必有帝號 方與稱帝之國平行 此指自主之王國而言也 在我國不當株守舊見 何也 自甲午更張之後 有獨立之名 而無獨立之實)"라고 하였다. 이렇듯 독립 후의 조선이 오히려 주권이 더 온전치 못하는 당대의 상황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인물도 있었음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별개로 19세기 이래 '제국(帝國)'이라는 용어가 일본과 중국 지식인들에게 어떠한 개념과 맥락으로 이해되었는지는 藍弘岳(2022). "「帝國」概念在漢文圈的翻譯與流傳:從幕末日本到清末中國". 《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集刊》 93(1). 참조.

    5). 한국의 '병합' 이후 제주도는 조선(반도)을 경유하지 않은 채 일본 제국이라는 체제와 직접적으로 대면하였다. '독립' 직후, 본토인과 제주민이 일본어로 소통하거나 제주어 통역관도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경험에서 기인한다. 한편 일본(내지)인들도 조선(반도)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제주도가 지니고 있는 타자성을 주목했다. 일본인들은 본토와 차별화되는 지역으로서 제주를 상정하고 그 타자성을 일본의 보편성으로 포획해나갔다고 한다. 이에 관해서는 김동현(2013). "로컬리티의 발견과 내부식민지로서의 ‘제주’".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참조.

    6). 프랑스의 사회학자 조르쥬 셀르(George Scelle)는, "만약에 식민지화(La colonisation)가 고대 제국의 정복과 팽창 체계에 원래 부합한다고 인정한다면 항상 존재해왔다. 이러한 체계는 지역 정부를 종속화시키고, 식민 모국의 기능에 따라 행정적으로 감시함으로써, 그리고 진공(tributs) 및 파병(contingents militaires)으로 이어지면서, 때로는 완전한의 형태의 '병합(l’annexion)', 또 때로는 애매한 '보호령(indécises de protectorat)', 또는 '속국(vassalité)'의 형태로 귀착했다"고 하였다. 명목상으로 '식민지(colonies)'는 주권이 결여되어 국제사회의 주체가 될 수도 없고, 어떠한 인격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리고 식민지는 식민 모국 영토의 일부분을 이루고 그 인민은 식민 모국의 국적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헌법적 지위와 법률들은 "식민 모국의 법적 체제의 일부분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셀르에 따르면, '식민지'는 꼭 식민 모국의 영토의 일부라고 볼 수도 없다. 인도인을 영국인으로, 베트남인을 프랑스인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피식민지의 집단과 식민 모국의 집단이 완전히 구분되었기 때문이다. 식민 모국과 피식민지는 구별되는 사회적⋅법적 체제를 형성하고, 개인의 사회적⋅법적 지위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다. 한편 위르겐 오스터함멜(Jurgen Osterhammel)는 "식민주의란 집단 간의 지배 관계로서, 이 관계에서는 종속민의 삶에 관련된 근본적인 결정이 문화적으로 이질적이며 적응 의지가 거의 없는 소수 식민자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식민자들은 외부의 이해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후 결정을 내리며, 실제로 이를 관철시킨다. 또한, 일반적으로 근대 식민주의에는 자신의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식민자의 확신에 근거한 사명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원칙이 결부되어 있다"고 하였다. 위르겐 오스터함멜(2006). 《식민주의》. p.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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