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중국의 속국이 아니었을까? - 종주권과 속국 그리고 조공국 등 개념사를 중심으로 -
속국은 전근대 자료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며, 노태돈·정병준도 전근대의 속국과 근대의 속국 개념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즉 현대에서 속국이라 하면 종속국이나 비자주적 보호국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 속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중국 왕조의 영토 내에 포함된 이종족 집단이며, 다른 하나는 조공국을 속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 영토 내의 이종족 집단과 조공국은 엄밀하게 구분되는 존재이다. 조선은 중국의 속방으로서 내치와 외교 부문을 모두 대조선국 군주가 자주해 왔다고 한다. 즉 중국 왕조와 조공 책봉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과 자주권을 행사한다는 것이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이석현. "중국의 번속제도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중국 번속이론과 허상》. 동북아역사재단. 2010. pp. 49-50.
이러한 이석현의 서술은 '속국'이라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통념을 가장 잘 서술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인식을 보면, '속국'이라는 텍스트를 '근대' 즉, 서구적인 성질과 '전통적' 내지는 '전근대'으로 설명하는 동양의 성질의 근본적인 차이를 전제하고 있다. 여기서 드는 여러가지 의문을 꼽자면, 첫번째는 서양의 '속국'은 모두 같을까? 두번째는 동양의 '속국'은 모두 같을까? 세번째는 동서양 '속국'의 보편성은 없을까? 네번째는 근대에는 정말 '근대적인 속국'만 있었을까? 다섯번째는 서양의 '속국'에는 자주성이 없었을까? 등이 있겠다.
2020년 7월, 독일 베를린 훔볼트포럼(Humboldt Forum) 한국관 전시 당시 큐레이터의 속국 발언 논란, 근래 국제정치를 전공한다는 모 세계사 유튜버의 조선 속국 발언 논란 등을 볼 때, 필자를 비롯한 대중 사이에서도 여전히 뜨거운 쟁점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필자는 학계 및 대중의 통념에 대한 위와 같은 의문점들에 대해 복합적으로 짚어 나름대로 검토하고 정리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조공국(Tributary state)과 속국(vassal State), 조공국과 서로 봉건적 관계(feudal relation)를 맺고 있는 나라들은 그들의 주권이 해당 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한, 주권국(sovereignty)으로 간주된다.
Henry Wheaton,《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Sixth Edition by William Beach Lawrence, Boston: Little Brown and Company, Advertisement to the first Edition, Part First Chapter Ⅱ §14, Tributary and vassal States, pp. 51~55.
일반적으로 서양의 속국은 기본적으로 모두 같지 않다는 상식적인 지적을 해보고자 한다. 일단 이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속국'으로 번역되는 서구적 텍스트에는 '봉신국(Vassal State)'와 '종속국(Dependent State)' 등이 있다. 사실 19세기 후반, 일본이나 조선에서 정치적인 의도로 '조공국(Tributary state)'과 '봉신국(Vassal State)'에 차별을 두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고종의 외교고문 O. N. 데니(Owen N. Denny)가 1888년에 내놓은 《청한론(China and Corea)》이 있다. 그는 주권(Sovereign)과 독립(Independent) 여부를 두고 조공국과 봉신국을 구분하였는데, 그의 논리는 후대 역사학, 정치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속국(Vassal state)'은 주권이 결여되었다는 통념을 만들어냈다. 사실상 봉신국과 식민지(Colony)를 동가관계로 설정하는 통념과 달리 데니가 청한론을 발표할 무렵, 실제 국제법 체계에서는 봉신국과 조공국은 동렬적인, 즉 동일한 범주로 분류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통념과는 달리 독일의 영방국과 나폴리 왕국 등은 종주국(suzerainty)에게 조공을 바치거나 경의를 표하는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독립(independency)과 자주(sovereign authority)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서유럽을 중심으로 했던 국제법 체계는 점차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기독교 정치체로도 확장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왈라키아와 몰도바 공국 등이 있었다. 다만, '종주권(suzerainty)'이 19세기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를 점진적으로 해체하기 위해 남겨둔 명목적이고 상징적인 권위에 불과하여 그 이전으로 소급적용하기 힘들다는 비판을 굳이 감안하여, 15세기 중반부터 술탄들에 의해 아히드나메(Ahidnâme)를 발급받아 오스만 제국의 '조공국(tributary state)'으로 성문화된 이래 1806년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였던 라구산 공화국의 예를 먼저 검토하고, 왈리키아와 몰도바 공국의 사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라구산 공화국은 근대 초기 국제법 체계를 재고하게 함으로써, 법적인 종속과 독립 사이의 일반적인 대립이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라구산 공화국은 아히드나메, 사실상의 항복을 통해 발칸 반도 일대를 지배하는 오스만 제국의 용인을 받아, 그 지배 안에서 실질적인 독립 상태를 유지하였다.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트란실바니아의 자치권과 왈라키아 및 몰도바의 자치권 사이에는 이미 상당한 차이가 있었고, 라구산의 자치권의 정도는 그들과 비교할 때 더욱 분명했다.
라구산 공화국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문명권 텍스트 차이를 이용하여 각종 미사어구를 통해 오스만과의 관계에서, 헌신적이고 자발적인 봉사하는 관계로 묘사하고자 했다. 라구산인들은 오스만의 지배력을 단순한 외교적 수사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내부적으로 1590년 라구산 공화국의 영토는 단지 자신들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직설적인 결론을 내리거나, 그 귀족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그들의 권력이 술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러한 자기정체성은 자신들의 권력이 "신의 의지와 술탄의 결정에 의해" 향유되었다고 인식한 왈라키아와 몰도바의 맥락에서 나타나는 언설과는 완전히 달랐다.
라구사인들은 술탄에게 복종한 적이 없었고, 오스만에게 납공한 공물(harac)은 어디까지나 그 상위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 보호를 위한 댓가에 불과하다고 합리화 했으며, 술탄이 의무를 져버릴 시에는 조공 관계를 철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조건부나 취소가 가능한 계약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라구산 공화국의 선전은 유럽의 지식인들에게도 부분적 내지는 무분별하게 수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독립적인 국가인 라구산 공화국을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안에서 논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은 라구산 공화국을 신민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도 그 관계를 매개로, 오스만 지배 하의 종속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라구산 공화국은 독립적인 정치체였으며, 서구 열강 또한 라구사를 종속 내지는 조공국으로 인식한다는 이유로 외교 관계를 거절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진출 이전의 몰도바와 왈라키아 공국은 단지 오스만제국의 군사적 침략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영구적인 종속의 표현으로 정기적으로 납공한 정치체였다. 오스만 제국은 내외부라는 극도로 모호한 개념을 가진 제국이었고, 두 공국은 오스만의 개념 안에서 직접 통치하는 지역 및 국가와 마찬가지로 대우받았다. 가령 그 통치자를 오스만 내의 하라즈귀자르(haracgüzar)나 보이보드 그리고 술탄의 신하로 여기며, 두 공국과 종종 트란실바니아의 통치자들을 세금 징수를 담당하는 관리로서의 위치시키기도 한 것이 있다. 오스만의 도나우 공국 지배는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시스템을 갖춘 '종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왈라키아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통해 구현됐다. 물론 이들 또한 19세기 '종주권'이나 '봉신국'이라는 용어에 대한 논쟁을 떠나, "조공하고 보호받는 집(dar ül-zimmet)", "자유(serbestiyet)", "특권이 있는 지방(eyalât-i mümtaze)"으로 여겨지면서 오스만 제국의 다양한 재정적, 행정적, 종교적, 법적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지위들은 오스만 조정과 이웃한 오스만 관리들의 간섭에 맞서 자신들의 영토와 주민들의 지위를 주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 조공 관계를 맺으면서 도나우 공국보다 느슨한 종속 하에 있던 라구산 공화국을 모델로 삼아, 도나우 공국에 라구사와 동일한 대우를 요구하여 1774년 퀴취크 카이나라즈 조약을 체결했다. 오스만 제국의 도나우 공국 지배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될 수록 내외부의 구분이 극도로 모호한 오스만 제국의 유연한 지배 방식은 점차, 1802년의 이오니아 군도 사례와 마찬가지로 "종주국-속국"이라는 비교적 명확한 해석을 창출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하였다. 1828년 발발한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결과, 1829년 아드리아노플 조약이 체결되면서 마침내 도나우 공국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la Suzeraineté)'이 정립되고, 두 공국의 자치(autonomy)를 인정하였다.
해당 분야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일부 루마니아 학자들과 같이 '종주국-속국' 관계를 오스만과 그 속국과의 관계에 적용하고 그 속국의 지위를 '봉신국', '조공국', '종속국', '보호령', '자치' 등으로 규정하는 것은, 도나우 공국들을 비롯한 그 속국들의 국가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함으로써 특수성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있다. 이러한 접근이 오스만 제국에 있어서 부적절할 여지는 있다. 그러나 "장관으로부터 분리되고 위배가 없으며 모든 면에서 자유롭다"(mefruzü'l‑kalem ve maktu'l‑kadem minküll‑il‑vücuh serbest olub)는 도나우 공국의 위상은 "제국에 대한 복속 이후"(feth‑i hakaniden berü)로 명확히 전제한다면 아예 틀렸다고도 할 수 없다. 애초에 라구사라는 하나의 정치체를 두고 라구산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의 이원적인 해석이나, 그리고 라구사를 모델로 삼음으로써 오스만과 도나우 공국과의 관계를 '종주국-속국'으로 정의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횡단경계적(transnational)인 접근을 시도해보자면, 오스만에 비해 내외정이 뚜렷하게 구분되고, 그 정치적 종속 관계가 이데올로기와, 그것을 기반으로 한 시스템성을 갖춘 명청대 조선의 지위에 적용하는 것은 오히려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사실 '조공', '보호',¹ '봉신', '자치', '종속'이라는 용어들은 서로가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같은 현실을 특성을 찾는 것에 불과하다. 가령 '조공'의 개념은 조선국왕이나 보이보드 등의 의무로서 그들의 법제적, 정치적 지위를 정의하고, '보호'는 오스만이나 청 조정의 책임 내지는 자소(字小)의 관점에서 동일한 위상을 의미할 수 있었다.² '봉신(Vassal)'과 '자치' 그리고 '종속'은 이 두 가지 측면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며, 자치와 종속의 경우는 오스만 술탄이나 명·청 황제가 각각 속국들에게 납공의 대가로 보장하는 상대적인 독립성, 안정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성질들은 모두 "합병과 단순한 동맹 사이"의 탄력적이고 포괄적인 범주, 즉 '반주권(Semi-Sovereign)'의 특질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점을 볼 때, 명청제국과 조선의 관계를 '종주국-속국' 관계로 분류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필자는 오스만 제국 말기 종주권의 등장 과정을, 제국의 지배력 약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원말과 상당히 비교할만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몽골복속기에 해당하는 14세기에 이르러, 고려국왕은 그 지위와 함께 몽골 카안(Qa'an)의 제후 내지는 제후왕이라는 봉건적 지위, 정동행성 승상(장관)이라는 관료적 지위, 부마(güregen)이라는 종법적 지위를 다층적으로 갖추게 됐으며, 몽골제국에서 고려가 '외국'이었는지, 혹은 '지방행정단위'였는지를 논쟁하는 것이 무의미한, 외교와 내정의 경계가 상당부분 흐려지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는 몽골제국의 특질이 반영된 것으로, 내외부의 경계가 극도로 모호한 오스만의 특질과 유사하다. 오스만의 속국들과 마찬가지로 이 시기 고려의 정치적, 관념적 위상에 대해서 '외연적인 속국', '내포적인 속령'의 성격이 모두 거론되는 점은 우연히 아닐 것이다.
공민왕의 병신정변과 주원장의 북벌 그리고 북원 정권의 붕괴라는 과도기를 거치면서, 원의 자리를 대체한 명은 원의 패권 또한 물려받을 수 있었다. 원의 붕괴와 함께 부마나, 정동행성 같은 외로아문의 위상은 탈각되었고, 명은 전조와 달리 고려를 지방행정단위와 명확히 구분된 외국(外國)과 속국(屬國) 등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단지 원대의 위상들만 탈락했을 뿐, 의례적·실질적 측면에서 몽골제국의 유산은 영락제 이후 청말까지 북경을 중심으로 한 패권질서 속에서 변용, 계승되었다. 그렇게 명청대에도 예제적, 법제적인 지배질서가 명목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조공국 조선에서 관철되었다. 황제나 황제권의 의향대로 상국과 속국의 계서적·위계적 관계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몽골복속기를 경험한 한반도에서만 유독 실질적으로 관철되는 특수한 현상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고종)가 종속(dépendance)을 단호하게 부정하려고 애써왔음에도 불구하고, 천하 제국(Céleste-Empire, 청)의 속국이기 때문에 강요당하는 치욕적인 의식을 수행할 결심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양 국가들과 조선간에 체결된 조약 이후 거행한 행사 중 가장 중요한 행사이기 때문에 각하께 자세한 전말을 보고 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외무부 문서〉 4, V. Collin de Plancy to Monsieur Ribot, Ministre des Affaires Etrangeres, le 10 Novembre 1890.
청말, 청제국의 조선 정책의 성격이 제국주의적인지 아닌지의 논쟁과 별개로, 서양 외교관들이나 김옥균 그리고 일본의 인사들은 의무적이고 정기적인 '조공(朝貢, tribute)' 그 자체를 종속 관계 여부를 다툴 수 있는 핵심적인 요소로 중시하였다. 1880년대 조선은 청의 의도에 맞서 (종주권을 부정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자주권을 주장하게 되었는데, 이때문에 조선에 대해 한계에 봉착해버린 청이 1890년 11월 조대비 사망을 빌미로 조문을 위한 칙사를 파견하였을 때 고종이 보여준 영칙 의례는 조공과 함께 많은 서구의 외교관들에게 조선과 청의 종속 관계를 관철시키는 반전을 낳았다. 그 정치적 의도를 떠나서 그 의례가 실질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 봉건적 관계가 조선에 대한 실제적인 지배로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영칙 의례에 관해 당시 미국 공사 허드(Augustine Heard)는 이러한 의례가 단지 "오리엔탈(Oriental)" 간의 행위에 불과하다고 일축하였지만, 이는 전통적인 의례를 무의미한 일로 치부하려는 수사적·개념적 속임수였다. 그는 본국에 대한 보고 과정에서 조선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서 결국 최후에는 "과거의 사적인 관계(ancient, private relations)", 즉 조공책봉관계를 매개로 한 군신관계에서 벗어나게 할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보자. 애초에 유럽이나 중동 일대 '속국'의 종속성은 모두 같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그 봉건적인 관계를 매개로 한 자주성의 정도가 일률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정치체들의 '속국' 내지는 종속적인 정치체들도 이러한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³ 즉, 보편성을 무시하고 있는 '동서양'이라는 이분법적 접근은 애초에 유효하지도 않다고 말하고 싶다. 경계를 넘나드는(transnational)·역사적 시간을 넘나드는(transhistorical) 접근을 따른다면 말이다. 따라서 명·청 제국과 조선의 관계에 있어 직할 통치(내지)와 속국의 경계가 오스만 제국보다 보다 뚜렷하다는 점,⁴ 조선의 '조공(tribut)'이 제국에 대한 정치적 복속(사대)을 전제로 한다는 점은,⁵ 제국이 물리적 한계에 따라 조선에 대해 한동안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자원을 투자하면서 지정학적, 경제적 이익 등을 유지하는 '간접적(비공식적)' 통치를 구현했음을 보여준다.⁶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명·청 제국과 조선의 관계를 학술적으로 '종주국-속국' 관계로, 조선의 지위를 '조공국(tributary state)'과 더불어 '종속(Dependency)', '자치(autonomy)', '속국(Vassal State)'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역사상에 적용하는 데 있어 하등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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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상적으로 '보호'를 오로지 근대적인 성질로만 언급하여, 전근대와 격절을 유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보호국화하기 이전까지는 국제법적 강제규범에 따른 보호국, 보호관계와 구별되는 중세적 보호국들이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이 단순보호국들은 실질적으로든 명목상에 불과하든 19세기 중후반까지 여전히 '자주'나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18세기 국제법 서적인 《국가들의 법(The Law of Nations)》에서는 고대 로마의 동맹국들이나 오스트리아의 루체른 보호를 거론할 뿐이었다. 《만국공법》 단계에서도 '보호'는 여전히 반주권의 특질 중 하나로 설명될 뿐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따라 1896년 《국제보호국(Le Protectorat International)》에서는 보호국을 '단순보호국(Protection Simple ou Sauvegarde)', '국제법적 보호국(Le Protectorat du Droit des Gens)', '식민지적 보호국(Le Protectorat Colonial)'으로 구분을 시도하였다. 따라서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에 와서야 각각 '봉신국(Vassal State'과 '보호국(States under Protectorate)'으로 명확히 분리한 것을 간과한 채로 단순히 강대국의 보호를 받을 뿐, 주권의 상실을 피할 수 있었던 약소국들을 의미한 피보호 성질을 조선과 아예 무관하다는 것은 몰역사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에 관해서는 유바다(2021). "1905년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 이론 도출에 대한 국제법적 고찰". 《韓國史學報》 85. 참조.
2). "어차피 칼자루를 쥐 쪽은 책봉국이지, 조공국이 아니 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간섭하지 않으면 그것은 책봉국의 관용과 은혜가 된다. 임진왜란 때처럼 비상시에 도와주는 것만 은혜는 아니다. 만약 책봉국이 조공국의 내정에 간섭해 올지라도, 조공국 입장에서는 전쟁을 불사하겠다 는 의지가 없는 한 그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계승범의 지적은 주목할만하다. 계승범(2020). "조선 시대 한중관계 이해의 몇 가지 문제".《동아시아사 입문》. p.577.
3). 조공책봉관계 내지는 조공관계를 '동양'으로, 그 본질을 모두 일반화하고, 세계사적 측면에서 특수성을 부각하는 시각의 문제점은, 청 제국 질서 속 조선의 특별한 위상을 다룬 필자의 다른 글을 참조. https://chinua.tistory.com/11
4). 그렇다고 명청대 '외국'과 현대적인 '외국'이 의미상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이 청 제국의 관념적 통치 영역에 깊숙이 포함됐었다고 볼 수 있는 연구들이 제출된 바 있다. 김창수(2013). "청의 조서(詔書) 반포 사신을 통해 본 조선의 지위". 《역사와 현실》 99; 王元崇(2018). "淸代時憲書與中國現代統一多民族國家的形成". 《中國社會科學》 2018-5. 참조
5). 학계 일각에서는 '종주권(Suzerainty)'과 '종주국' 같은 용어가 명청대 주변국이 '상국'인 명청을 지칭하는 데 쓰이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역사성이 부재하다고 비판하지만, 법학이나 역사학에서 학술 용어로 쓰는 것은 문제 없다고 생각된다. 사실 그런식으로 따지고 보면, 서구 학계의 '조공(tributary)'이라는 용어가 로마제국에서 부의 교환에서 기원한, 경제적 측면을 강조하는 용어라는 점에서, 종종 강력한 위계성을 포함하기도 하는 중국사에서의 '조공'의 역사성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학술용어로써 '조공(tributary)'은 이미 그 의미가 확장되어 다양한 성질을 포괄함으로써 사용하는 데 있어 큰 문제점은 없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상국'과 상국이라는 유교적 명분으로 정당화 된 정치적, 외교적 권리들은 모아 각각 '종주국'과 '종주권'으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19세기 후반 청과 일본의 서구 텍스트 번역의 혼란을 감안하더라도, '종주권(Suzerainty)'이 '상국권' 등으로 두 개념 사이의 대응관계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번역될 수 있던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에 관한 연구들로는 계승범(2010).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이동욱(2019). "청말 종주권 관념의 변화와 조선 정책의 전환". 《사총》 96; 손성욱(2021). "『중외역사강요』의 전근대 대외관계 인식— 두 차례 등장한 ‘종번관계’를 중심으로 —". 《사림》 78. 참조.
6). 커크 W. 라슨은, "제국의 몇몇 속성에 관한 찰스 마이어(Charles Maier, Among Empires, p.33)의 매우 일반적인 다음의 묘사가 여러 방면에서 정확히 조선이 명·청 시대 중국과 맺은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 깜짝 놀랐다"고 평하였다. 필자도 아주 공감하는 바이다. "제국은 다양한 민족 또는 국가 단위의 엘리트들이 지배 권력의 정치적 지도력에 동조하고 묵인하는, 특정한 형태의 국가 조직이다. 통제·편의·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제국은 지배적인 중앙부 또는 중심지를 다스리는 사람들의 가치를 받아들인다. 물론, 제국은 종종 바로 그런 가치를 이식하거나 가치에 영향을 미치려고도 한다. 각자의 사회 내에서 지위를 획득한 제국들은 이제 다자적무대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 각 국가의 수도 또는 지역의 중심지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계층은 제국의 수도에서 진행하는 계획을 따른다. 그들은 대체로 공동의 적에게 대항한다. 그들은 제국의 중심지를 방문할 때 만족을 느낀다." 커크 W. 라슨(2021). 《전통, 조약, 장사: 청 제국주의와 조선, 1850-1910》. p. 8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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