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무제, '조공책봉관계'로 조선에 지배질서를 관철하다
오카모토 다카시(岡本隆司)는 조명관계와 조청관계를 구분하고, 전자를 '종번관계(宗蕃關係)'로, 후자를 '종속관계(從屬關係)'로 명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청의 경우 세자를 인질로 잡거나, 막대한 세폐를 조공하게 하는 등 조명관계에 비해 훨씬 엄격하고 가혹한 요구를 했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명대에는 '번속(藩屬)'으로, 청대에는 '속국(屬國)'으로 구분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시도는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종속관계'로 지칭할 수 있는 범주가 포괄적이고 탄력적이기도 하고, 주대 봉건제 이념을 고사와 그에 수반하는 각종 미사어구로 포장된 4·6변려체적 서술에 현혹되어 조선과 명의 종속관계보다는 이념적인 질서에 불과하다는 늬앙스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청 제국의 흥기라는 광역적 통치질서의 재구성 과정에서 조선은 무력으로 신속하였기 때문에, 청초 조청관계는 공민왕의 순조로운 '칭신봉표'로 수립된 조명관계에 비해 실제적으로나 관념적으로나 강압성이 띄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명관계는 명 황제를 중심으로 한 종주관계로, 천하의 중심에 자국을 설정하고 그 말기까지 이상적으로 보이든 아니든 간에 철저히 자국의 실익을 위해 움직였으며, 불평등한 위치에 놓였던 조선의 종속성은 종종 보다 선명하게 부각된다.
아울러 이 논의는 청말의 대조선 정책, 즉 종래의 한국 학계에서 '속국화'나 '식민화'로 표현되는 청 제국의 행보를 과연 의례적인 '조공관계'에서 실질적인 종속관계로의 이행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과도 불가분적 관계에 있다. 가령 1876년 초 일본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한 데 대해 이홍장은 "조선은 빈약하여 그 세력이 일본에 미치지 못하는데, 장차 이 나라가 이전의 명의 옛 사례를 들어 대방(大邦)에게 도움을 구하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度朝鮮貧弱 其勢不足以敵日本 將來該國或援前明故事求救大邦 我將何以應之)"라고 우려의 뜻을 밝힌 바 있다. 조명관계와 조청관계의 의례적, 이념적 차이를 본질화해서 양자를 일정이상 차별화하거나, 19세기 후반 의례적 조공관계가 아예 와해되었다고 보는 단선적인 시각 등에서는 쉽사리 해석하기 어려운 발언이다.
이렇게 나를 의심하면 성곽을 수리하고 군량을 사들이며, 활과 화살·포석·군마를 준비하여 곧 상대할 것이지 네 사인(使人)들에게 정탐하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지금 정벌한다 혹은 정벌하지 않을 것이다 하는 것을 감히 말할 수 없으나, 어쩔 수 없이 정벌해야 한다면 그대들이 어떻게 행동하든지 그대 나라를 정벌할 것이다. ……
나는 충혜왕[波皮王]을 환관 용복(龍福)이 말 위에서 강제로 연행한 것과 같은 짓은 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부마였기에 잡혀왔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니, 나를 의심하지 말라. …… 우리를 의혹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만약 내가 정벌해야 한다면 명백하게, 정벌할 것이다. 오랑캐를 멀리 몰아낸다면, 5년 내에 정벌하지는 못하더라도 10년 내에 정벌할 것이다. 올 거면 지금 오고, 그럴 마음이 없다면 오지 말라.
高麗史 世家 권44
사실 명 제국이 출현하고 원 제국이 쇠망하는 이른바 '원말명초' 시기, 명 제국과 북원 정권 그리고 그 잔류 세력 등 다양한 집단들이 요동과 그 일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광역적 통치질서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명 제국과 한반도 국가는 요동의 패권 재조정 문제 등으로 상당한 마찰을 빚었다. 요동 지역으로 군수물자와 병력을 호송하는 등 요동 진출을 본격화한 홍무제는 1372~73년 고려의 빈번한 사행을 의심하여 고려를 힐난하고 3년 1행 요구와 더불어 아예 사신의 입경을 금지하거나, 1374년 초에는 고려에게 제주에서 공마 2천여 필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거기다 공민왕이 시해되고 명의 사신까지 피살되자, 그는 우왕의 책봉을 거부하고 고려 사신들을 억류했다.
1378년 홍무제는 억류했던 고려 사신들을 일부 방환시키며, 이듬해에는 관계 개선을 위한 조건으로 매년 막대한 양의 금·은·포·마를 조공하면 고려에 대한 의심을 거두어줄 것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아가 고려에서 데려간 요동의 인구를 송환하도록 하여 그들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했다. 이때 홍무제는 1380년부터 금 100근, 은 1만 냥, 세포 1만 필과 함께 질 좋은 말 100필을 매년 조공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 고려가 수차례 세공을 바치자, 그는 세공의 액수가 약정과 같지 않다며 접수를 막는 한편, 고려가 배반했다가 복속했다가 한결같지 않다고 힐책했다. 이에 고려는 입경을 허락해주고 세공의 진헌을 접수해달라 애걸해야 했지만, 돌아온 것은 5년여 치의 공마를 500필이 아니라 5천여 필이라고 하는 홍무제의 번복적 성지였다. 물론 1384년 6월, 나가추(Naγaču)와의 충돌을 앞두고 전마를 필요로 했던 홍무제가 고려와의 긴장 국면을 해소할 겸 세공 액수를 300냥을 말 1필로 쳐주고, 금 50냥을 말 1필로 절가해주면서 고려의 부담을 덜어주었지만, 어쨌든 고려는 결국 진헌반전색(進獻盤纏色)을 설치하는 등 전국의 말을 쓸어 모아서 명 제국에게 공마해야 했다.
1385년 말까지 고려로부터 말 5,233필과 포 5만여 필을 조공받은 홍무제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세공을 감면해 3년 1공할 때 질 좋은 말 50필을 바칠 것을 명했다. 다만 3년에 한 번 바치는 세공과 별개로 1년 3행에서 바치는 조공 품목도 정해져 있었는데, 금은기명 등 8종이었다. 《조선태종실록》에 따르면, 금은 150근이고, 은은 700냥을 매년 바치고 있었다고 한다. 즉 선덕연간 황제가 면제해줄 때까지 한반도 국가는 금·은의 조공에 수반하는 곤란을 감수해야 했다. 어찌되었건 고려는 홍무제에게 재작년 억류됐던 사신을 해방해준 데 대한 감사의 뜻와 함께, 공민왕의 시호와 우왕의 책봉을 요청하였다. 홍무제는 우왕의 등극 11년만에 비로소 고려의 '정성'을 인정해주고 우왕에게 고명과 인장을 내려준 것이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홍무제는 신료들이 왕을 갈아치우는 대역 행위를 힐책하면서 우왕의 '선위'와 더불어 창왕의 책봉을 거부했다. 새 정권은 이색·강회백·이방원 등을 보내어 왕관(王官: 감국)과 창왕의 친조(親朝)를 요청하였다. 홍무제가 정치적 권위를 빌려주지 않는 상황에서 이렇듯 보다 적극적 방식으로 우왕의 선위 사실을 인지시키고 공인받고자 했다. 홍무제는 이미 고려의 왕위 교체가 이성계의 책동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고, 결국 창왕과 공양왕은 책봉을 받지 못했다. 홍무제는 고려 내정에 발휘되는 종주권이 유명무실해질 수 있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연출되자, 고려를 길들이기 위해 책봉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성교(聲敎)가 갖는 권위를 보전한 것이다. 물론 고려의 집권 세력은 이 상황에서 홍무제의 성지나 예부자문을 자의적으로 소비해서 내정에서 정권의 정당성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이성계 정권은 마침내 조선 개국을 선언하였으나, 홍무제는 당근과 채찍으로 새로운 국명을 보고하라거나, 조선이 제시한 국호를 채택해주는 등 개국을 인정하면서도 "성교자유(聲敎自由)"를 내세워 이성계의 국왕책봉 의사가 없음을 시사했다. 홍무제는 과거 공민왕 시해에 대해 힐난하거나, 고려가 공민왕의 시호와 우왕의 책봉을 요청했을 때, "성교자유(聲敎自由)"를 내세워 정치적 권위를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393년 5월, 홍무제는 조선이 행례(行禮)를 가장하여 요동의 변장을 유인하고, 요동의 여진 500여 인을 압록강으로 유인했다는 등 5가지의 이유를 들어 책망하며 정벌 위협을 가했다. 이때 그는 "이미 간 여진의 모든 사람을 돌려보낸다면 짐의 군사는 경계를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조선의 생흔과 모만을 문책한 이유를 보다 분명히 드러냈다.
황제는 군사가 많고 정형(政刑)이 엄준하였으므로 마침내 천하를 차지했지만, 사람을 죽임이 정도에 지나쳤으므로 원훈(元勳)과 석보(碩輔)들이 생명을 보전하지 못한 자가 많았고, 이에 우리 작은 나라를 자주 책망하면서, 강제로 청구함이 한량이 없었다. 지금 또 나에게 죄가 아닌 것을 책망하면서, 나에게 군대를 일으키겠다고 위협하니, 이것이 어린아이에게 공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太祖康獻大王實錄 권3
이성계는 홍무제를 비난하며 반발했으나, 정작 조선의 신료들의 그다지 동조적인 제스처를 취해주지 않았다. 이성계는 어떻게 회답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우선 내가 말을 낮추어 조심스럽게 섬길 뿐이다(吾且卑辭謹事之耳)"라는 태도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은 재빨리 협조적 태도로 조치를 취했다. 그는 제명(帝命)에 따라 이성(泥城)·강계(江界) 등지로 들어온 여진인들을 찾아 보낼 것을 명령했다. 두달 뒤인 7월, 홍무제는 요동도사에게 조선국의 조공사를 끊을 것을 명령함으로써 조선이 6월과 9월에 파견한 하성절사와 하정사는 모두 되돌아와야 했다. 그는 성지를 내려 "너의 지성을 보아서 내가 사람을 시켜 너희를 불러 오게 하겠다"며 입공을 3년 1공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년 8월, 조선은 요동의 여진인들을 유인한 적은 없고 그들은 단지 도망해온 것에 불과하다거나, 본래 고려인이지만 요동에 살던 자들이 고향이 그리워 도망해온 자들만 있다고 해명하였다. 그럼에도 이들 여진인 400여 인을 모두 송환하고, 요동에서 온 고려인 122호 388명도 모두 명 제국에 송환함으로써, 이제 조선은 요동의 인적 집단이 경내로 들어오면 제국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즉 요동의 인적 관할권을 배제당한 셈이다. 홍무제의 행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이듬해 4월 홍무제는 칙지를 내려 조선에 환관들을 보내 1만여 필의 공마와 더불어 조선에서 잡아간 본국민을 조선국왕의 아들이 직접 데려올 것을 명령했다. 조선은 진헌관마소(進獻官馬所)를 설치해 말을 거두고, 6월부터 요동으로 수차례 공마했다. 한편 군주의 아들 정안군(靖安君) 이방원을 사신으로 파견하고 몇달 뒤에는 또 하성절사를 파견하여 어떻게든 홍무제의 의도에 부응하고자 했다.
이방원의 부경이 허락되고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자, 조정은 조선인 승려들이 요동을 넘나들면 모두 처형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1395년 2월 북면의 7인이 범월을 이유로 처형당해 효시되었고, 5월에는 명에서 명 제국이 조선을 공격할 것이라는 와언을 전한 승려를 참형에 처했다. 나아가 요동에서 넘어오는 유이민들을 철저하게 제국 내지로 송환하도록 하면서 홍무제의 심기를 건들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래야만 홍무제로부터 책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0월 한양 천도 이후 처음으로 종묘를 참배한 이성계는 다음달 명 제국에 사신을 보내어 고명과 인신, 즉 책봉을 주청했다. 명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은 우왕을 폐위한 그가 명 황제로부터 책봉받지 못했다는 것은 이성계가 중심이 되는 조선왕조의 심각한 약점이었다.
'조공책봉관계'에 수반하는 언설은 시대를 불문하고 유사해보이지만, 주체별, 시기별로 본질은 다원적이거나 탄력적이었다. 이성계 정권이 이 무렵 홍무제로부터 책봉을 받을 수 있다고 상정했을지 모르지만, 홍무제는 그보다 더 강력한 종주권¹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해 12월, 이성계의 책봉 요청이 도달하자, 그는 곧바로 지난 10월에 조선이 보냈던 하정표문의 수사를 문제삼았다. 이른바 표전(表箋)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그는 또다시 정벌 위협을 가하면서, 자신을 모만하는 이 표문을 지은, 이전에 요동을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정도전을 제국으로 보내면 억류한 사신을 해방할 것이라는 성지를 내렸다. 아울러 책봉 주청에 대해서도 이제 조선이 왕의 나라가 되었으나, 왕이 간악하고 간사하며 교활하고 사특하다고 힐난하면서, "인신과 고명을 청한 것은, 경솔하게 줄 수 없다"고 노골적으로 책봉을 거부했다. 1396년 2월, 이 소식을 접한 조선은 표문의 수찬자가 투병 중이라는 핑계로 전문의 수찬자 김약항만 명에 보내어 해명하고자 했다.
홍무제는 여기서 더나아가 두달 뒤 명은 1차 표전 문제 당시 억류된 사신들의 처자들까지 인질로 요구하였고, 불응하면 사신들을 유배하겠다고 겁박했다. 동년 6월에는 사신을 보내어, 정도전의 송환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정도전은 이성계 정권의 핵심 인물이자 세자의 스승으로, 홍무제는 여러 실질적·의례적 이유들을 연동시켜서 이성계 정권의 근본과 후계 구도까지 모두 뒤흔들고 있던 것이다. 결국 조선에서도 남은이 표전의 수찬자 정도전과 억류 사신의 처자들을 보내지 말 것을 상서하는 등 반발 기류가 조성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때에도 홍무제의 노련한 행보를 선보이는데, 정도전의 송환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명사로 하여금 조선에게 최후의 타협책으로서 "친가(親家)", 즉 통혼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은 "황제께서 혼사를 맺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종묘에 고유하였다(以帝許做親 告宗廟)" 그리고는 신속하게 부경사를 보내어 혼사를 맺자고 한 일을 사례하였다. 홍무제는 그해 11월 표전 문제를 해명하러 온 하륜으로 하여금 자신이 제안한 통혼의 진정성을 강조하고, 이성계에게도 "지성(至誠)"을 요구하였다.
홍무제가 요동 문제를 책봉과 표전문 그리고 공기(貢期) 문제로 표출하는, 즉 본래 전혀 다른 문제를 '예'의 원칙 문제들로 연동·치환하여 이성계 정권에게 정치적인 고압을 가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성계에게 홍무제의 통혼 제의는 과거 고려가 정권을 향방을 위해 거란제국과² 몽골제국에게 위험부담을 앉고 통혼을 제안했듯이, 당면한 문제를 일소하고 정권의 정통성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홍무제가 요구한 "지성"이란 정권의 핵심인 정도전의 송환을 전제하였던 것으로, 이성계 입장에서 쉽사리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도전의 송환을 압박하며 통혼의 뜻을 전한 명사 우우(牛牛)는 끝내 정도전의 송환에 실패하고 11월 하순에 귀국하였다. 이성계는 직후에 설장수를 보내어 혼사에 대해 사은하고 공물을 진헌하거나, 억류 사신들의 처자들을 제국으로 보내는 등 저자세를 취했으나 끝내 정권을 관통하는 정도전만은 송환할 수 없었던 것이다.
1397년 4월, 권근이 자신도 표전문을 수찬하는 데 관여했으므로, 설장수 등과 함께 사신으로 가고자 했다. 정도전은 이들이 이색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지만, 이들은 표전 문제를 지혜롭게 해명하고자 하였다. 반면 정도전의 측근으로 의심받은 정총은 홍무제가 내려준 옷을 입지 않고 현비의 상을 위해 흰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이전에 구류된 김약항·노인동 등과 함께 처형당했다. 설장수 등이 귀국하면서 홍무제가 통혼 제의를 파하고 그것을 예부에 내려 조선에 자문을 보내도록 하였다는 것이 알려졌다. 홍무제는 조선이 사은하면서 바친 조선이 혼인 논의에 사은하며 바친 안마(鞍馬)의 흠을 핑계로 통혼의 논의를 파한다는 고풍스러운 문책을 하고 있지만, 다른 자문에서 "왕이 만일 깨닫지 못하면 이 사람(정도전)이 반드시 화근일 것(王若不悟斯人必禍源耳)"이라거나, 설장수를 통한 선유에서는 "이모(李某: 이성계)는 분간할 줄을 모른다. 정도전을 써서 무엇을 할 것이냐?(李某沒分曉鄭道傳用他做甚麿)"며 통혼 논의의 파기가 명을 위협한 정도전 송환 문제와 결부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성계가 정도전과 통혼을 맞바꾸지 않음으로써, 안위를 보전한 정도전은, 표전 문제를 해명하고 돌아온 권근과 설장수 그리고 양천식 등의 탄핵을 기도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간다. 아울러 남은과 심효생 등이 거병해서 요동을 공벌할 것을 제안하는 등 홍무제에 대한 반발 기류가 수면 위로 부상한다. 한편 통혼의 논의가 파기됨에 따라 같은 해 9월, 이성계는 세자 방석과 혼인한 심효생의 딸을 3년만에 세자빈으로 책봉하여 정권의 후계 구도를 내부적으로라도 공고히 하고자 했다. 이때 정도전은 다음달 설치된 가례도감의 제조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당년 11월에는 제국에 구류되었던 인사들이 모두 처형됐다는 사실이 조선에도 알려졌다. 다음 달에는 홍무제가 또다시 천추사가 들고온 계본의 문자를 문책하는 3번째 표전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예부로 하여금 표전문에 기롱하고 모욕하는 글자를 썼기 때문에 앞으로 3년 1행할 것과 표전문을 보내지 말라고 조선 사신에 통보했다. 조선은 예부상서에게 회신을 보내어 해명과 함께 1년 3행을 요청하였으나 통하지 않았다.
동북면 도선무순찰사 정도전과 도병마사 이지란(李之蘭) 등이 복명(復命)하니 각각 안마(鞍馬)를 주고, 인하여 잔치를 내려주고 왕이 도전에게 일렀다. "경의 공이 윤관(尹瓘)보다 낫다. 윤관은 다만 9성을 쌓고 비(碑)를 세운 것뿐인데, 경은 주군(州郡)과 참로(站路)를 구획(區劃)하고 관리의 명분까지 제도를 정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삭방도(朔方道)를 다른 도(道)와 다를 바가 없이 하였으니 공이 작지 않다.
太祖康獻大王實錄 권13
같은 달, 이성계는 정도전을 도선무찰리사로 임명하였다. 정도전은 단주(端州: 단천시)로 부터 공주(孔州, 경흥군)에 이르는 동북면 삭방도(朔方道)를 영토화하고 신흥 왕조의 발상지를 재정비했다. 1398년 3월 정도전과 이지란이 돌아오자, 남은은 필히 여러 절제사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관민으로 편제할 것을 청하였다. 요동 현안을 주시하는 홍무제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기 위한 요동에서의 무력시위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이성계 정권의 치명적인 약점을 타격할 수 있는 왕자들의 병권을 제압해야했기 때문이다.
대사헌 성석용(成石瑢) 등이, "전하께서 무신들에게 진도(陣圖)를 강습하도록 명령한 지가 몇년이 지났음에도, 절제사 이하의 높고 낮은 원장(員將)들이 스스로 강습하지 아니하고 그 직책을 게을리 하오니, 그 양부(兩府)의 파직된 전함(前銜)은 직첩을 관품에 따라 수취(收取)하되 1등을 체강(遞降)시킬 것이며, 5품 이하의 관원은 태형을 집행하여 뒷사람을 감계(鑑戒)하게 하소서"라고 상언하니, 왕이 말하기를, "절제사 남은·이지란·장사길 등은 개국 공신이고, 이천우(李天祐)는 지금 내갑사 제조(內甲士提調)가 되었으며,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회안군(懷安君) 이방간·익안군(益安君) 이방의·무안군(撫安君) 이방번·영안군(寧安君) 양우·영안군(永安君) 이방과·순녕군(順寧君) 지(枝)·흥안군(興安君) 이제·정안군(靖安君) 이방원은 왕실의 지친(至親)이고, 유만수(柳曼殊)와 정신의(鄭臣義) 등은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므로 모두 죄를 논의할 수 없으니, 그 당해 휘하 사람은 모두 각기 태형 50대씩을 치고, 이무(李茂)는 관직을 파면시킬 것이며, 외방(外方) 여러 진(鎭)의 절제사로서 진도(陣圖)를 익히지 않는 사람은 모두 곤장을 치게 하라."고 하였다.
太祖康獻大王實錄 권14
각지의 왜구 문제가 진정된 1398년 윤5월을 전후로, 진도(陣圖)의 강습을 위주로 요동 공벌을 위한 군사훈련이 본격화 되었다. 동년 7월에는 점검 과정에서 부실한 측면들이 보고되자, 해당 진의 훈도관을 가두거나 첨절제사들을 매질하는 등 엄격한 군사훈련이 진행되었다. 다음달에는 헌사에서 진도를 제대로 익히지 않은 혐의로 삼군절제사(三軍節制使)와 상장군·대장군·군관 등 292인을 탄핵하거나, 진도의 강습을 게을리 한 혐의로 절제사 이하의 높고 낮은 원장(員將)들이 탄핵되는 등 요동 공벌이 급박하게 준비되었다. 이 때문에 서울에서 시위(侍衛)하는 군관 중 진도를 익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한편 요동 공벌을 추진한 정도전과 남은은 천조의 기세가 강성하고 백성을 위해 요동 공격을 반대하던 조준이 휴가를 떠나 있음에도 그의 거처에 직접 찾아가 "공요(攻遼)의 이행은 지금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公)은 다시 말하지 마시오(攻遼之擧 今已定矣 公勿復有言)"라고 몰아세우는 등 조정 내 알력다툼도 심화되고 있었다.
1398년 8월 말, 정안군 이방원 등의 왕자들이 주축이 되어 반란을 일으키니,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들은 요동 공벌을 추진하던 이성계 정권의 핵심인 정도전·남은·심효생 등과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왕자들을 신속하게 제거하였다. 이렇게 정권의 핵심 인물들과 후계 구도를 모두 제압함으로써 이들은 실권을 잡을 수 있었고, 요동 공벌을 좌절시킴으로써 이성계가 명 황제권으로부터 책봉받을 수 있는 최후의 방안을 막아 이성계를 사실상 폐위하였다. 당년 9월에 이성계가 정종에게 전위하자, 조선의 새 정권은 다음달 설장수를 명에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자 하였으나 요동도사에서는 홍무제가 정했던 3년 1행이라는 기한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좌절되었다.
사실 홍무제는 이미 윤5월 10일에 붕어하였으며, 조선 조정은 설장수의 임무를 진향사(進香使)로 대체하여 입경시킬 수 있었다. 이후 조선이 황태손이었던 건문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신을 파견하고, 건문제는 정종의 즉위를 승인함으로써, 요동의 재구획과 '조공책봉관계'의 설정을 두고 이루어진 홍무제의 구조적 압박과 이성계 정권의 반발로 인한 긴장 국면은 유야무야 되었다. 홍무제의 죽음과 함께 매듭지어진 조선의 이 문제는 조선국왕의 상부적 존재로서 권위를 행사한 명 황제권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홍무제는 현실 문제를 표전문·세공·공기(貢期)·책봉이라는 '예'와 '의례'의 문제로 치환하거나 연동시켜 고려와 조선 왕조를 끊임없이 '문죄'하였다. 그리고 조선은 왜 그것이 '비례'인지 스스로 깨닫고 황제의 의중에 맞추어 발빠르게 대처해야 했다. 즉, 명 제국은 일종의 시선의 감시 권력을 작동시켜 조선에 대한 구조적 지배를 시도하였고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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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스만 제국이나 명·청 제국에서 '종주권(Suzerainty)'에 비견하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명·청 황제권이 조선의 주권의 상부적 존재로서, 정치적 권위를 행사하거나 작용하는 점을 볼 때, 그것을 '종주권'으로 상정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특히 조선이 별개의 국가였다는 것을 염두하면, '종주권'이라는 용어가 내외정이 모호했던 오스만 제국보다 오히려 더 부합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에 관해서는 필자의 다른 글 참조. https://chinua.tistory.com/m/13
2). 996년 고려 성종은 요 성종에게 표문을 보내어 혼인을 청하였는데, 이때 요 성종은 통혼 관계를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부마인 동경유수(東京留守) 소항덕(蕭恒德: 소손녕)의 딸을 시집보낼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소항덕이 불의의 사건으로 처형당하고, 이듬해 고려 성종이 죽으면서 거란은 폐백을 돌려보내고 통혼은 취소되었다.
이택선(2008). "예(禮)를 통한 감시 권력의 구조적 작동: 이문과 표전문을 중심으로 본 조선과 명·청의 관계". 《지식과 국제정치》.
정다함(2017). "朝鮮 太祖代 遼東 공격 시도에 대한 재해석 -여말선초 동아시아의 광역적 통치질서 재구성과 ‘경계인’ 이성계". 《역사와 담론》 84.
이명미(2017). "성지(聖旨)를 통해 본 여말선초의 정치·외교 환경". 《역사비평》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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