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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의 국호 '대원(大元)'의 역사카테고리 없음 2019. 11. 9. 20:31
한국사와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서 원나라는 1271년에 건국된 몽골제국의 계승국가로 통용되는 것 같다. 그러나 원은 몽골제국의 한문 국호일 뿐, 양자는 구분되는 것이 아님이 자명하다.
I. '대원(大元)'은 몽골인들의 천신신앙이 내포된 몽골제국의 한문 국호이다.
1271년 쿠빌라이 카안(Qubilai qa'an)이 건국호조(建國號詔)를 하유하기 전까지 한문 사료에서 몽골제국은 대조(大朝: 대국) 혹은 대몽고국(大蒙古國) 등으로 지칭되었다. 그러나 쿠빌라이 카안이 건국호조를 반포함에 따라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제정하게 된다. 쿠빌라이 카안은 진·한과 같이 흥기한 곳의 명칭을 취하거나 수·당과 같이 수봉(受封)된 곳의 명칭을 취했던 전례를 따를 필요가 없음과 동시에 적절한 국호를 제정할 당위성을 설명하며 《역경》에 나오는 "크도다! 건원이여.[大哉乾元]"라는 구절에서 국호를 취했다고 설명했다. 쿠빌라이 카안이 대재건원에서 따온 '원(元)'의 의미는 《경세대전(經世大典)》에 기록되어 있는데, "원(元)은 큼(大)과 같은 것으로, 커서 다함이 없는 것을 일컬은 것"이라고 전한다.
구육 칸이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보낸 서한
그렇다면 대재건원에서 국호를 취한 까닭은 무엇일까? '대재(大載)'는 크다는 뜻을 지니며 '건원(乾元)'은 큰 하늘을 뜻한다. 1203년 칭기스 칸(Činggis qan)이 뭉커 텅그리(Möngke Tengri)의 가호로 커러이트 울루스(Qereid ulus)를 정복할 수 있었음을 선언했다고 전하는 《몽골비사》의 기록, 뭉커 텅그리의 명령은 칭기스 칸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뭉커 칸(Möngke qan)의 발언을 전하는《뤼브룩여행기》의 기록, 구육 칸(Güyük qan)이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뭉커 텅그리의 힘에 의지한 예커 몽골 울루스의 사해(四海)의 칸'을 자칭한 인장을 사용한 점 등을 살펴보면 칭기스 칸 이래 몽골제국 군주들은 자신이 '광활하고 영원한 하늘' 즉, 뭉커 텅그리의 선택을 받았다고 믿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남송의 팽대아(彭大雅)와 서정(徐霆)이 남긴 몽골제국 견문기 《흑달사략》에는 몽골인들의 상용어 중 "뭉커 텅그리의 힘으로"가 있었음을 전한다. 즉, 대원(大元)은 큼을 극도로 강조한 추상명사이며 그 속에는 몽골인들의 천신신앙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II. 새로운 국호는 몽골제국의 국호 중 하나일 뿐이다.
타이페이 고궁 박물원이 소장 중인 세조 쿠빌라이 카안의 그림.
《경세대전》에는 “세조 황제(쿠빌라이 카안)가 처음으로 대몽고(大蒙古)의 호칭을 바꾸어 대원(大元)이라고 하였다.(世祖皇帝初易大蒙古之號而爲大元也)"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보면 몽골제국을 가르키는 몽골어 명칭인 '예커 몽골 울루스(Yeqe mongɣol ulus)' 또한 대원으로 대체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몽골제국 시기 금석문을 살펴보면 '예커 몽골 울루스'와 '대원'은 일체화 혹은 연결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었다. 1335년에 한문과 몽골문으로 새긴 《장씨선영비(張氏先塋碑)》에서 한문 '황원(皇元)'은 몽골문 '예커 몽골 울루스'로 번역되어 있고, 1346년에 건립된 《칙건흥원각비(勅建興元閣碑)》에서 '원(元)'이 '예커 몽골 울루스'로 번역되어 있다. 1338년에 건립된 《다루가치 제운터이(Daruγa-či ǰeγuntei)의 비》에는 '대원이라 불리는 예커 몽골 울루스(Dai ön qemeqü yeqe mongɣol ulus)'라는 국호가, 1362년에 세워진 《지원22년추봉 서녕황흔도신도비(至正二十二年追封的西寧王忻都神道碑)》에는 '대원 예커 몽골 울루스(Dai ön yeqe mongɣol ulus)'라는 국호가 나타나 있다.
III. 대원은 중국식 국호인가? 이자 국호인가?
'대원' 국호 제정에 대한 시각은 두 가지 정도로 엇갈리는데, 첫번째는 중통(中統)과 지원(至元)이라는 중국식 연호 차용, 금의 중도(中都, ʤuŋ du) 고지에 중국식 도성 건설 등 중국식 제도 차용의 일환으로 국호 제정을 이해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대원'이 이전의 중화제국들의 국호와 완전히 다른 큼을 극도로 강조한 추상명사이자 이자 국호라는 것이다. 사료를 고찰해본 바 '대원'은 중국적 요소와 몽골적 요소가 융합되어 있는 국호임을 알 수 있었다.
새로운 국호 제정은 한인 고문인 유병충(劉秉忠)의 제안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새로운 국호는 상술하였듯이 몽골인들의 천신신앙을 반영하여 기존 중화제국의 전례를 어긴 것이긴 하나 이전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단자 국호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하나인 《역경》에서 "관념상 철저하고 명망 높은 상징"을 취하는 등 국호 제정에 관한 칙령은 매우 중국적인 문서였다. 따라서 새로운 국호인 '대원'에 중국적인 요소가 없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몽골제국기 형용사 '대'(大, yeqe, buzurg)가 몽골 황권과 관련된 주요 용어 였음이 판명됐다는 사실이 새로운 국호인 '대원'과 관련이 있다는 의견도 있으나, 금석문상 '대원'은 대금지(大禁地, Yeqe qoriq, Ghurūq-i buzurg)나 대쿠릴타(Yeke qurilta, Qūrīltāī-yi buzurg)와 달리 몽골문으로도 '다이운(Dai ön)'이라고만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크게 관련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IV. '대원'은 17세기 초까지 사용되었다.
1368년, 몽골제국의 카안 울루스는 주원장의 북벌에 따라 키타이(Kitai: 화북)을 상실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원나라의 멸망"으로 표현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15세기 동서몽골리아의 패권을 장악한 4오이라트의 어선(Esen)은 명 황제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을 '대원의 하늘의 성스러운 큰 카안[大元田盛大可汗]'이라 칭했고, 15~16세기 만두울 칸(Mandu'ul qa'an)을 이어 몽골리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6투먼 체제를 확립한 바투 뭉커 다윤 칸(Batu möngke dayun qa'an: 다얀 칸)은 "대원 울루스를 지배하리라(Dayan ulus-i ejeleqü boltuɣai)"라고 하며 '대원'을 자신의 칸호로 삼았으며 명에 보내는 서한에서 자신을 대원대가한(大元大可汗)'을 자칭했으며, 16세기 후반 차하르의 수장이었던 부얀 다융 서천 칸(Buyan dayung sečen qa'an) 역시 '대원'을 자신의 칸호로 취했다.
1607년경에 편찬된 《알탄 칸(Altan qa'an)의 전기[Erdeni tunumal neretü sudur orosiba]》에는 알탄 칸의 치세에 그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 3만호의 노얀(Noyan)들이 자신의 울루스를 '다윤 예커 울루스(Dayun yeqe ulus)'로 불렀다고 전하는데, 이 기록은 다얀 칸 사후 6투먼 체제 자체가 거의 붕괴한 알탄 칸의 치세의 몽골인들에게도 '대원 울루스'가 여전히 존재했다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며, 1636년 조선을 방문한 후금의 호부승정(戶部承政, Boigon-i jurgan-i aliha amban) 잉굴다이(Inggūldai)가 의주부윤 이준에게 "우리의 나라(후금)가 이미 대원(大元)을 얻었고 또 옥새를 차지했다.(我國旣獲大元又得玉璽)"라고 말하였다는 점에서 당시 후금의 지배층이 차하르를 비롯한 몽골제부를 '대원'으로 인식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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