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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빌라이 카안, 고려를 복속하고 주권을 보장하다 - '조군(육사)'를 중심으로 -
    카테고리 없음 2022. 8. 5. 10:28

    13~14세기 몽골(원) 복속기, 고려가 원 제국에서 행정적으로 '성(省, Province)'이라거나, 고려국왕을 '투하(投下)'로, 그가 관할하는 고려 인구를 봉읍(封邑) 내지 채읍(采邑), 즉 '아이막(ayimaq, 愛馬)' 정도로 보고자 하는 경우가 있는 듯하다. 이들은 대개 고려의 재래왕조체제가 '부마고려국왕(駙馬高麗國王)'의 '왕부(王府)'와 '투하령(投下領)'의 특색에 불과하다는 모리히라 마사히코(森平雅彦)의 견해를 피상적으로 흡수하여, '원 간섭기'라는 용어를 '지배'보다 '간섭'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고 왕조의 유지를 강조하는 한국사학계에 비판적이다. 아울러 고려를 원 제국의 '점령지(Occupied Territory)'나 '식민지(Colony)'로 전망하고자 한다.

    일전에 모 네이버 블로거가, 필자의 다른 글에서 총리아문의 언설을 "청 제국은 조선이 명목상 속국(Vassal State) 또는 조공국(Tributary State)에 해당하지만, 실은 자주(Sovereign) 독립(Independent) 상태라고 해석할 수 있는 국제법적 프레임에 휘말린 것일 뿐"이라고 평가한 것을 두고 "조선족" 운운하며 비난한 바 있는데, 필자는 조선의 위상을 '종속국(Dependent State)'으로 전망하지만 그 주권이 몰수당했다고 한 적은 없다. 남의 글을 제대로 이해해보고자 하지도 않고 정치적·인종적 혐오와 비국민 논리에 서슴없는 그의 태도의 부적절함과 별개로, 오히려 몽골(원) 복속기 고려를 '일제강점기'에 비유하면서 주권의 결여를 제창하는 일부 '역덕'들이야말로, 그가 인종차별적으로 '조선족'이라는 외피를 씌운 비국민에 부합하는 것일테다. 그렇다면 몽골 복속기 고려는 국가성을 상실했는지 한 번 검토해보겠다.

    1219년 몽골군이 복속한 야율 유가의 이반 세력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발발한 강동성 전투에서, 실질적으로 고려가 몽골을 도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몽골은 고려를 구원했음을 자처했다. 급변하는 광역적 통치질서 속에서 고려는 결국 몽골군에 '투배(投拜)'함으로써 영원한 화호를 약속하고 세공(歲貢)을 제공해야 했다. 1231년 수공사 저고여의 피살을 빌미로 몽골은 이전의 맹약을 넘어서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는 몽골을 '상국(上國)'으로 받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몽골제국은 포선만노의 정토에 조군(助軍)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때 이전의 전투 등에서 정규군을 망실한 무신정권은 존재 기반 자체를 망실할 우려가 있는 조군 요구를 '배반'하고 고려 군주를 끌고 강화도로 들어가서 몽골군이 침공해오면 임기응변식 대응으로 사신을 보내어 통호를 반복했다.

    몽골군은 1240년 5월 국왕친조, 출륙환도, 점수민호, 투르각(turγaγ, 禿魯花) 등을 요구하였고, 1241년 4월 영녕공 왕준이 의관자제를 거느려 몽골로 갔으나, 고려는 다른 조건들에 호응하지 않았다. 이후 몽골은 다시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하였는데, 이제 국왕친영과 태자친조를 요구함으로써 조건을 완화했다. 그렇게 1259년 4월 고려 집권층은 태자친조가 약속하여 철군을 관철하였다. 다음 달 고려는 태자 왕전은 몽골제국에 입조시키고자 하였으나, 이 무렵 뭉케 카안이 갑작스레 붕어했다. 쿠빌라이(qubilai)가 뭉케의 후계자 아릭 부커(ariq Böke)에게 반기를 들었다. 결국 몽골제국은 내전에 돌입하였는데, 이때 태자 일행은 '양초지교(梁楚之郊)'에서 북상하던 쿠빌라이와 조우하여 폐백을 바쳤다. 이 과정을 두고 쿠빌라이는 고려의 세자가 스스로 와서 자신을 따른 것은 곧 하늘의 뜻이라 선전했으나, 태자의 내조와 별개로 사실 고려는 여전히 신속을 표방한 적이 없었다.

    쿠빌라이는 조량필의 건의에 따라 왕전을 번왕(藩王)으로 예우하고, 그를 '책위왕(冊爲王: 책봉)'하여 고려로 귀국시킨 뒤 영원한 동번(東藩)으로 삼고자 했다. 쿠빌라이는 자신이 왕으로 삼은 왕전을 거역하는 경우 고려국왕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겠다고 고려 집권층을 압박하는 한편, 곧이어 고려에 다른 조서를 전달하였다. 이때 원종이 복속의 조건으로 요구한 의관의 본국지속의 유지할 것, 조정에서만 사신을 보낼 것, 출륙환도는 역량에 맞추어 진행할 것, 압록강 유역의 몽골군이 철병할 것, 다루가치(daruγa-či)가 서환할 것, 금후에는 투탁하는 자를 받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아릭 부커와의 일전을 앞둔 쿠빌라이가 고려의 복속의 대가로 군주권, 영토, 백성 모두를 보장해준 것이다. 즉, 고려는 일정한 주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원종은 곧바로 영안공 왕희를 사신으로 보내 쿠빌라이의 즉위를 축하하고 공식적으로 복속을 표방했다.

    그렇게 1260년 8월 고려에 주둔하던 몽골군과 다루가치 패로합반아발도로(孛魯合反兒拔覩魯)의 귀국 조치가 내려졌고, 원종에게 책봉에 수반하는 '호부국왕지인(虎符國王之印)'을 수여했다. 그러나 1261년 말 쿠빌라이 카안이 아릭 부케와의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자, 훗날 안남과의 교섭에서 몽골군에 의해 '육사(六事)'로 일컬어지는 복속국에 대한 요구를 수차례 제기하고 고려가 호응하지 않는 것을 힐책했다. 그리고 1264년 5월에 이르러서는 아릭 부커를 제압했다는 자신감 가운데 원종의 친조를 요구했다. 고려 조정에서 원종은 물론 많은 신료들이 조근을 두려워했으나, 입조하지 않으면 화친이 깨질 것이라는 이장용의 극언에 따라 국왕친조가 이루어졌다. 원종의 친조가 이루어지자 이제 쿠빌라이의 조군 요구는 제국의 종속국의 당연한 의무처럼 변모했다.¹


    지원 17년(1280년)에 수렵을 하고 있는 쿠빌라이 카안의 모습을 묘사한, 유관도(劉貫道)의 《원세조출렵도축(元世祖出猟図軸)》.

    이 무렵 일본 초유에 관심을 가지게 된 쿠빌라이 카안은 1266년 8월, 고려에 흑적(黑的)과 은홍(殷弘)을 국신사로 파견하여 원종에게 일본 초유의 향도 역할을 일임했다. 11월, 쿠빌라이는 조서를 내려, "경(원종)은 사신이 그 땅(일본)에 도달하도록 안내하여 …… 이 일은 경이 책임지고, 풍랑이 험하다는 말로 핑계대지 말고 이전에 일본과 통한 적이 없다고 하며 혹시 그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고 보낸 사신을 거부할까 염려된다고 핑계대지 말라. 경의 충성은 이 일로 드러날 것이니 각별히 힘쓰라(卿其道達去使 以徹彼疆 …… 玆事之責 卿宜任之 勿以風濤險阻爲辭 勿以未嘗通好爲解 恐彼不順命 有阻去使爲托 卿之忠誠 於斯可見 卿其勉之)"고 하였다. 즉 조군을 매개로, 그리고 조군을 위해서 '충성'을 끌어내어 구조적 지배를 관철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원종과 고려 조정은 일본 초유에 상당히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은근히 쿠빌라이에 반발했다. 1268년 2월, 쿠빌라이 카안은 입조한 안경공 왕창에게 "짐의 사신이 너희 나라에 이르면 너희는 사람을 시켜 에워싸고 감시하니 진항(眞降)의 뜻이 마땅히 이와 같은가(朕使至爾國 則爾使人圍守 眞降之意當如是耶 爾國來聘 朕亦使人守汝使乎)"라고 고려를 힐난했다. 그는 복속을 하였으면, 마땅히 출륙환도를 이행하여 다루가치를 청해 민호를 세어보고, 물자와 군대를 수송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당년 3월과 5월에도 다시 고려를 비난하면서 조군의 의무를 다할 것을 명령했다. 쿠빌라이 카안은 그 과정에서 출륙환도의 지체를 고수하는 무신정권의 수장인 김준의 송환을 요구하였는데, 결국 몽골제국이 고려에 전제한 '복속'이 '조군'과 불가분적 관계에 있다는 점이 명확해지자 김준은 강화도보다 더 먼 섬으로 천도하고자 했으며, 이에 반대한 원종은 폐위를 위협받는다. 원종은 임연과 결탁해서 김준을 제거했지만, 임연 또한 1269년 6월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 왕창을 옹립했다.

    김준과 더불어 원으로 간 이장용이 원종의 '선위'의 정당화해줄 것을 믿은 임연의 기대와 달리, 그는 원종의 폐위가 강제적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했으며, 귀국 중이던 세자 왕심은 압록강변에서 소식을 접하고 되돌아가 출륙환도를 약속하고 부왕의 복위와 공주강가(公主降嫁)를 청했다.² 당시 원 추밀원에서는 거짓을 고하면서 계속 쿠빌라이 카안의 명령을 져버리는 고려를 일본 초유를 이유로 폐절하고 군현화하자는 강경론이 제기되고 있었는데, 이 사건은 쿠빌라이 카안에게 고려 내정에 개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동년 9월 쿠빌라이 카안은 왕심을 특진상주국(特進上柱國)에 제수하고, 3천여 병을 주어 귀국시켰으며, 관군만호(管軍萬戶) 송중의(宋仲義)에게 고려의 정벌을 명했다. 다음 달에는 병부시랑 흑적(黑的) 등을 파견하여 원종의 복위와 함께 원종과 왕창 그리고 임연을 12월 초10일까지 입조를 명령했다.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국왕(國王) 두련가(頭輦哥)로 하여금 힐문과 초륙할 것을 압박했다. 12월, 왕준(王綧)과 홍차구(洪茶丘)의 3천여 병으로 고려를 정벌하고, 서경도통(西京都統) 이연령(李延齡)의 청병에 따라 뭉거두(mönggedü)에게 2천여 병을 주어 고려의 경계로 보내었다.

    근자에는 상국에 청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폐립하니, 법으로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방(遠邦)을 다스리는 일은 통상적인 방법에 매여서는 안 되고, 반측한 자를 제어하여 안정시키는 일은 권도를 따르는 데에 힘써야만 합니다. 오늘날 소국의 일은 이미 이와 같은 지경입니다. 아조(我朝)에서는 마땅히 깊이 생각하여 논의해야 합니다. 바라건대 아뢴 바와 같이 만약 죄를 용서하고 나아가 책봉한다면 상국에서 고식적인 정치를 하지 않겠지만, 혹 병사를 일으켜 토벌하는 지경에 이른다면 세 군대에게 온전한 승리의 공적이 없게 될까 두려우니, 양쪽의 죄를 모두 풀어주지 말고 중도를 헤아려 취하되 단지 폐립한 일에 있어 도모한 신하 한 사람은 국문하시고 잘못한 사람들의 중죄는 모두 용서하십시오. 저들 주와 성의 군민들은 많고 적음을 살피고서 분리하여 둘로 만들고 그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십시오. 권세를 부리는 세력들을 서로 견제하게 하면 우리나라에 안정된 의논과 좋은 대책이 되어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그 사람들마다 반드시 성조(聖朝)에서 관대하게 포용한 큰 은혜를 생각할 것이고 그 나라는 깎이지 않고도 저절로 약해질 것입니다. 옛날 한의 주보언(主父偃)이 제후들의 권력을 삭탈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 논의입니다. 더욱이 고려 변방의 잔당들이 바다의 섬 저 먼 곳에서 조정의 성교(聲教)를 듣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데, 마땅히 관대히 용서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새로워지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또한 우리 상국에 있어 먼 곳을 마음에 품고 변경을 안정시켜서 잔혹함을 이기고 죽음을 면하는 뜻이 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이 계책을 버리고 행하지 않는다면 혹 위력으로 소환하거나 혹은 병사를 모으고 진격하여 정벌해야 할 것인데, 만에 하나 소국의 권신이 방자하고 흉악하게도 반역을 일으켜 산으로 둘러치고 물에 의지하면서 송과 더불어 연맹하여 섬에서 저항한다면, 우리 성조에 비록 용맹한 병사 백만이 있을지라도 시간이 흘러도 그들을 정복하지 못할 것이니, 심히 대국의 이로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元高麗紀事 지원 6년 11월

    그러나 당년 11월 추밀원에서는 고려의 군사적 정복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상주들이 올라왔다. 쿠빌라이 카안은 조정의 논의대로 고려를 폐절하는 대신 고려의 충성을 유도하는, 즉 길들이는 것으로 향방을 정했다. 1270년, 그는 반란을 일으키고 몽골에 투항한 서북병마사 최탄과 이연령의 서경 진수 요청대로 3천여 병을 서경에 주둔시키고, 최탄과 이연령에게는 금패를, 현효철과 한신에게는 은패를 하사하고 서경을 행정구역으로 편제해서 동녕부로 삼았다. 한편 원종은 당시 순안후(順安侯) 왕종(王琮)에게 감국을 맡기고 입조하고 있었는데, 병력을 주면 권신들을 제거하고 개경으로의 환도를 단행하겠다고 약속하고, 세자 왕심의 요청에 이어서 다시 한 번 혼인을 청했다. 이때 동녕부를 설치함으로써 쿠빌라이 카안은 일전에 약속했던 '완복구강(完復舊疆)', 풀이하면 영토와 민호에 대한 관할권의 회복을 번복한 것이었다. 원종은 나흘 만에 카안에게 상표하여 반환을 청하지만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당년 2월, 쿠빌라이 카안은 혼례를 이루어 영원한 번왕의 직분을 다하겠다는 원종의 청혼에 대하여, "달단(達旦)의 법에는 중매를 하여 합족(合族)하는 것은 진실로 교친(交親)하는 것이니 짐의 어찌 허락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다른 일 때문에 와서 청하는 것이 너무 서두르는 것 같으므로, 귀국하여 백성을 잘 보살피고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여 요청을 해야 허락할 수 있다. 짐의 친식(親息)은 이미 모두 적인(適人)하였으므로 형제들과 모여 의논해서 허락하겠다(達旦法 通媒合族 眞實交親 敢不許之 然今因他事來請 似乎欲速 待其還國 撫存百姓 特遣使來請 然後許之 朕之親息 皆已適人 議於兄弟會 當許之)"고 회피하였다. 그해 2월에는 황태자 진김과의 회견을 막고, 원종에게 일국의 군주는 자신을 보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하였다. 이때 쿠빌라이 카안은 고창 위구르의 이디쿠트(亦都護) 바르죽(巴而朮)이 선부하고, 카를룩의 아르슬란(阿思蘭)이 후부한 것을 두고 제왕의 위하(下位)를 설정한 전례를 들어 자신의 은혜를 부각했다.

    이후 원종은 자신의 요청대로 다루가치와 함께 귀국하였다. 원종과 세자 왕심은 이제 몽골 황제권을 빌려 왕권과 후계 구도를 구축하려 했다. 홍문계 등이 임유무를 주살함으로써 무신정권은 타도됐으나, 원종이 출륙환도를 서두르면서 삼별초의 해산과 명단 작성을 명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삼별초는 당년 6월, 승화후 왕온(王溫)을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의 난은 남송과 일본 원정에 전략적 차질을 야기하였다. 이들의 경략을 위해서는 고려 정세의 안정이 필수불가결한 과제였다. 이듬해 2월 말, 원종은 사신을 보내어 공식적으로 청혼하였고, 6월에는 세자 왕심과 의관자제 20여 명을 질자(質子)로 파견했다. 11월, 마침내 쿠빌라이 카안의 허혼 소식이 고려에 들려 왔다.

    1272년 3월에 허혼과 함께 귀국한 세자 왕심은 호복에 변발을 하고 있었다. 세자는 고려 신료들에게도 호풍을 강요하였고, 1274년 5월 쿠빌라이 카안의 막내 딸 쿠틀룩 켈미시와 대도에서 혼례를 올리고, 원종이 죽자 먼저 귀국하여 공주를 맞이하는 과정에서도 변발하지 않은 신료들을 배제하고 계체한 이들만 대동했다. 충렬왕은 이제 몽골 황제의 부마(güregen)가 되었고, 쿠다(quda)의 일원이 됨으로써 다른 용손들과 차별되는 권위를 확보했다. 그는 몽골 황제권을 빌려서 무신집권으로 실추된 왕권을 후계 구도를 고착화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고려 조정은 1272년 7월에 금주에 왜선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은폐한 것이 밝혀져, 홍차구가 경상도 안무사 조자일(曹子一)을 심문하고 쿠빌라이 카안에 보고하거나, 1275년에도 충렬왕이 김방경을 몽골에 보내어 일본 원정에 조군하기 위한 병량 확보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등, 쿠빌라이 카안이 '복속'의 증표로 상정한 '조군에 여전히 비협조적이었다.

    쿠빌라이 카안은 허혼을 통해 고려 왕실과의 제휴와 내정의 안정화를 추진하는 한편, 고려 조정에 필적하는 견제 세력에 힘을 실어 '조군'이 중심이 되는 지배질서를 관철하고자 한다. 그 중심이 된 것이 홍차구였는데, 그는 원종폐립 사건 당시 고려로 들어와 1271년에 숭겸(崇謙) 등이 다루가치 살해를 모의하려다 발각된 일을 고려 조정과 연루시키고, 그것을 구실로 삼아 개경의 점거를 기도했다. 6월 말, 홍차구는 힌두(忻都, hindu) 그리고 김방경 등과 여몽연합군을 이끌고 진도를 함락하여 그 위세를 꺾었다. 동년 8월에 원종이 표를 올려 동녕부의 환부를 요청했으나 무시당했고, 윤11월에도 사신을 보내어 동녕부로 민호가 이탈하는 문제를 호소하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2월, 쿠빌라이 카안이 조서를 보내오니, 남송과 일본과 교통한 것을 힐책하고 추후에 남송이든 일본이든 간에 조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압박하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그는 "일을 잘 해서 성공하겠다고 다투는 자가 매우 많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깊이 생각하라"고 요심의 고려인 세력으로 하여금 고려 왕실을 견제하고 지배하겠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삼별초의 진압과 일본 초유 과정에서 고려 내정에서 홍차구의 입지가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종 귀국과 함께 들어온 다루가치들도 계속 유지되었다. 1272년에는 이익(李益)을, 1274년에는 흑적을 다루가치로 파원하였으며, 그 외에 부(副)다루가치와 다루가치경력(經歷)도 따로 두었다. 이들 다루가치와 관군관(管軍官)은 고려 내정에서 사법권을 행사했다. 이들은 고려국왕 및 신료와 함께 사법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잡문(雜問)'을 하였으며, 이들 간의 의견이 합치되지 않으면 입조해서 몽골 황제권의 최고 결정을 기다려야 했다. 물론 다루가치들은 가끔 참월하고 부당하다는 이유로 고려의 본속을 변개하고자 하였으나 대부분 고려의 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상술한 사법 문제 그리고 고려 사회의 무기관리와 같은 치안을 유지하는 역할만을 수행했다. 사실 다루가치와 관군관은 원종 복위 이래 고려국왕과 몽골 황제권의 정치적 제휴를 상징하는 역할이었다. 게다가 충렬왕대에 이르면 고려국왕이 부마의 위상을 확보하면서 다루가치 흑적을 통제하여 그가 거만방자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결국 흑적은 30개월 임기의 다루가치를 7개월 밖에 못채우고 귀국하였다. 아울러 충렬왕은 1276년 6월에 중서성에 상서(上書)하여 다루가치경력 장국강(張國綱)을 칭찬하면서 연임을 요청하거나, 2년 뒤 부다루가치 석말천구의 계유(契由), 풀이하면 중서성에 보고하는 인사평가[契由]에서 혹평을 했다는 기록을 보아 다루가치의 상부적 지위를 확보했음을 알 수 있다.

    1273년 초, 양양성을 함락하고 남송 정복이 막바지에 이르자, 쿠빌라이 카안은 일본 원정에 집중하면서 이듬해 고려에 임시 군사기구인 정동도원수부(征東都元帥府), 1277년에는 정동원수부(征東元帥府)를 설치하였다. 이는 고려 내지에서 홍차구의 입지가 강화될 것이 뻔하였다. 홍차구는 요심 지역을 중심으로 각종 전역에서 활약하였고, 제국에서 군 지휘관들이 공훈을 세워 행성 재집에 임명된다는 점에서 큰 위협이었다. 여전히 다루가치 이익이 잔치에서 부마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는 논란이 발생했듯이, 몽골 지배층으로부터 부마보다는 '외국지주(外國之主)'로 여겨진 충렬왕은 이제 사전적 의미의 부마가 아니라 부마 제왕으로서 공훈을 확보해야 했다. 당년 12월, 전대장군 위득유(韋得儒) 등이 앙심을 품고 부다루가치 석말천구(石枺天衢)와 원수 힌두에게 김방경의 반란을 무고하자, 충렬왕은 군공이 컸던 그를 해방했으나 홍차구와 힌두의 압력으로 유배당하고 말았다. 나아가 홍차구는 이를 구실로 몽골 조정에 3천여 병을 증파할 것을 요청했다.

    1278년, 충렬왕은 입조하여 일본 원정에 대한 적극성을 보여 카안의 이목을 끌고 그 자리에서 홍차구와 힌두의 소환을 요청하였다. 충렬왕이 일본 원정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표방하자, 허망한 말을 하는 것과 언약을 지키지 않지 않을 것을 다짐받고자 했다. 마침내 쿠빌라이 카안은 힌두와 홍차구 그리고 몽골군을 철병시켰다. 게다가 충렬왕이 평장 카바이(哈伯)에게 일찍부터 고려와 왕래했던 낭가타이(郞哥歹)를 왕경 다루가치, 즉 정다루가치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쿠빌라이 카안은 "어찌 다루가치를 쓰겠는가? 대체 낭가타이가 어떤 사람이길래?(安用達魯花赤爲 抑郞哥歹么麽人也)"라고 되물었다. 그러고는 충렬왕이 스스로 잘 하면 될 것이라고 하며 존재의의를 상실해가던 다루가치를 모두 철수시켰다.³ 곧이어 정동원수부도 동경으로 이치되었다.


    히고국(肥後国)의 다케자키 스에나가(竹崎季長)가 도해하는 여몽연합군을 상대로 나아가 모습을 묘사한 에미키.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 前巻2 〈분에이의 역(文永の役)〉 詞5, 絵5-8

    충렬왕은 환국한 뒤 일본 원정 준비에 적극적으로 착수했다. 1280년 6월, 쿠빌라이 카안은 차간누르에서 재차 일본 원정을 논의하였고, 동년 8월에 강남과 고려 본국에 정동행성을 다시 설치했다. 이때 힌두와 홍차구 등이 정동행성의 우승(右丞)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충렬왕은 입조하여 쿠빌라이 카안에게 우승 홍차구의 직임은 그가 공훈을 세운 뒤 올려줄 것과 더불어 자신을 정동행성의 행성사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다. 11월, 충렬왕은 고려의 선왕들이 요ˑ금 두 왕조로부터 개부위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책봉받고, 자신도 세자 때 특진상주국(特進上柱國)으로 임명되었다는 고금의 예를 근거로 들었다. 쿠빌라이 카안은 이렇게 대일 원정 과정에서 경쟁을 유발하여 고려에 대한 구조적 지배와 '조군'을 관철할 수 있었다. 12월, 카안은 충렬왕을 중서좌승상 행중서성사(中書右丞相 行中書省事)로 책립하고 인장을 수여했다. 처릭 터무르(闍里帖木兒)와 더불어 자신이 '정동(征東)"의 일을 주관함으로써 외부 군대로부터 군권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1281년 3월, 충렬왕은 자신이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한 점을 근거로 선명(宣命)에 '부마'를 추가할 것을 청하여 '부마국왕선명(駙馬國王宣命)'과 '정동행중서성장(征東行中書省印)'을 받았다. 마침내 고려국왕은 부마이자 행성사라는 권위를 더하여 힌두와 홍차구의 상부적 지위로 대우받을 수 있었다.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의 통혼으로 부마라는 종법적 지위를 얻었고, 부마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일본 원정의 적극적 참여라는 장래의 공훈을 약속함으로써 정동행성승상이라는 관료적 지위도 얻었다. 이 두 가지 위상은 고려국왕의 권리와 고려 국가의 독립성을 모호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독립국을 유지하는 장치로써 기능하게 된다. 제2차 일본 원정은 실패로 돌아가고 1282년 정월, 강남과 고려의 군정행성을 모두 폐지되었다. 이듬해 4월, 쿠빌라이 카안은 충렬왕을 정동행중서성좌승상으로 임명하여 강남의 행성사 아랄해(阿塔海)와 일본 원정을 논의하도록 하였으나, 이때는 강남의 행성이 실제적인 전쟁준비를 전담하고, 고려의 정동행성은 그 부담에서 제외되었다. 1284년 5월, 2차 일본 원정의 철회되면서 5월 강남의 행성이 폐지되었으나, 고려의 행성은 일본으로부터 진변만호부를 중심으로 동남해안을 방어하는 책무를 맡았다.

    1285년 11월, 강남에 3차 정동행성이 설치되면서 고려의 정동행성은 다시 일본 원정 재개에 착수하여 군수물자를 제공하였다. 이후 1287년 5월, 행상서성(行尙書省)으로 개칭되었다가 1291년에 행중서성으로 명칭이 돌아왔다. 이때 정동행성의 실상은 나얀(nayan)이나 카다안(qada'an)의 반란 진압, 즉 '조군'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그 외에도 고려 조정과 별도로 몽골 조정에 사신을 파견하거나, 내지행성의 요소가 유입되어 유학제거사(儒學提擧司)와 좌우사(左右司) 그리고 이문소(理文所) 등의 관서와 일부 속관이 추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동행성은 여전히 일본 원정의 뜻을 포기하지 않은 쿠빌라이 카안의 의지와, 일본 원정을 내세워 정동행성을 유지하고자 한 충렬왕의 의향이 합치하여 상설형 군정행성으로서 존치된 것이다. 이는 1292년에 충렬왕이 일본을 완미하게 복속하지 않은 나라로 지칭하면서, 고려가 일본과 인접하므로 자신이 직접 일본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자 한다고 표방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1290년대 초, 쿠빌라이 카안은 이제 고려에 구조적 지배를 관철했다고 보고, 선부한 홍씨 일가 등을 요양행성 재집시키는 한편, 동녕부와 그 인적 관할권, 즉 서북제성(西北諸城)을 고려에 환부함으로써, 옛 강토를 모두 회복[完復舊疆]시켜 주었다. 나아가 조인규(趙仁規)를 고려국왕부단사관(高麗國王府斷事官)으로 삼고 금호부(金虎符)를 하사함으로써 비로소 부마고려국왕을 원 조정의 권력 체계 안에서 '제왕'으로 공인하였다. 충렬왕은 이제 자신과 제국대장공주의 통혼하는 데 있어 활약한 공신들에게 '상국지제(上國之制)'인 다르칸(darqan) 제도에 따라 면죄의 특권을 하사했다.

    14세기 몽골 연방(Mongol Commonwealth). 1260년대, 쿠빌라이 카안은 훌러구(hülegü) 및 알구(alγu) 울루스(차가다이 울루스)와 제국을 분할하였고, 훌러구와 알구 그리고 쿠빌라이에게 포위된 버르커(berqe) 울루스(주치 울루스)는 자연스레 제국에서 이탈했다. 카안 울루스(쿠빌라이 울루스)와 서방 3대 울루스는 한동안 대몽골 울루스(yeqe monγol ulus)라는 관념을 유지하였으나, 몽골 제국(Mongol Empire)은 사실상 해체(dissolution)되었다. 카안 울루스는 서방 3대 울루스를 행성(行省)이나 왕부(王府)에 준하는 것으로 표현하고자 제왕들에게 봉작과 인장을 내리는 등, 명목상에 가까운 맹주 및 종주권을 유지하였다. 제국의 해체 이후, 서방 3왕가의 제왕들은 카안 울루스의 6등봉작제(六等封爵制)에 포함되지도 않았고, 실질적인 군주로서 대내적으로 '칸(qan)'이나 '황제(皇帝)'를 자칭하는 등 이른바 '외왕내제(外王內帝)'를 지향했다.
    게군(揭君: 게이충)이 나(이곡)에게 말하기를, "정령이 나오는 문이 많으면, 백성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감당하지 못한다. 지금 사해(四海)가 일가(一家)가 되었는데, 동국(東國)에서는 어찌하여 중조(中朝: 원)의 법을 불행(不行)하는 것인가?"라고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고려는 옛 삼한의 땅으로 풍기(風氣)와 언어가 화하와 서로 같지 않으며, 의관(衣冠)·전례(典禮)도 스스로 하나의 법도를 이룬다. 진·한 이래 누구도 신(臣)으로 삼지 못했는데, 지금 성조(聖朝: 원)에 이르러 친분으로는 구생(舅甥)의 관계요, 은혜로 말하면 부자(父子)와 다름없다. 민사(民社)· 형정(刑政)은 모두 예전대로 행해지고, 이치(吏治: 중조의 법)가 미치지 못한다. 무릇 고려라는 일국(一國)의 명(命)과 일성(一省)의 권한을 총괄하여 전결하고 있기 때문에 '국왕승상(國王丞相)'이라고 칭하니, 사적으로 총애하는 그 은혜와 중하게 위임한 그 부탁이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稼亭先生文集》 9권 〈送揭理問序〉

    쿠빌라이 카안 시기 고려가 복속하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과연 고려가 20세기 초 일본의 한국 병합과 같이 주권을 몰수당하고 원 제국의 '식민지(Colony)'나 '점령지(Occupied Territory)'로 전락했는지 의구심이 든다. 상술했듯이 '부마'와 '승상'이라는 위상은, '부마국왕(駙馬國王)'과 '국왕승상(國王丞相)'이라는 당대의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단지 고려국왕의 주권을 보호하는 장치였다. 물론 그 장치는 고려국왕위를 부분적으로 떼어준 대가였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고려는 카안 울루스에 복속한 만국 중 유일하게[萬國獨一] 국호ˑ군신ˑ사직ˑ백성ˑ토지 등의 주권을 보장받았다. 고려에 정동행성이 설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고려가 국가가 아닌 '행성(行省)', 즉 '성(省, Province)'이 아니라는 점은 보다 분명하다. 고려 조정이 민정을 장악하고 있었고, 애시당초 고려국왕이 독립국의 군주로서 행성사를 겸하여 '일성지권(一省之權)'에 해당하는 군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성과 조정은 별도의 조직 체계가 작동하기는 했어도, 일본 원정이 좌절된 무렵에 정동행성승상에게 고려국왕으로서의 업무 외에 다른 업무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고려의 군주권을 보전하기 위해 반자발적으로 끌어들인 장치인 정동행성은, 대부분 고려국왕이 고려 내지인들을 임명하였다. 즉, 정동행성은 실질적으로 동급 기관인 고려 조정에 종속되어 있었고, 고려의 내정과 외교를 아우르는 군주권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혹자는 피로인을 중심으로 성립된 '본투하'의 사례로 '부마'를 '투하'로 파악하여 고려 신민을 '아이막(aiymaq)'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고려 신민은 피로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적이 없다. 게다가 '불개토풍(不改土風)'으로 표상되는 제국의 본속주의 정책을 염두하면 고려가 초원지대에 있는 정치체가 아니라는 사실만 더욱 선명해진다. 따라서 호구조사와 징세의 면제는 고려가 '본투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몽골이 고려 조정으로부터 호적(戶籍)을 제공받지 못해 고려 민정을 장악하지 못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와 역사적 맥락을 망각한 채, 결과론적 해석으로써 양자간의 교집합을 찾아 당대에 거론되지 않은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은 비역사적인 접근이다.

    쿠빌라이 카안이 '조군'을 통해 고려에 구조적 지배를 관철하고자 하였고, 충렬왕은 이 실제적인 종주권을 받아들이고 활용하면서 1278년부터 묵묵히 '조군'이라는 군사적 대가를 지불하였다. 그 결과 고려 왕조는 국가성을 유지하였고, 한편으로는 고려국왕이 원 조정에서 '제왕'이라는 권위를 확보했다. 이른바 원 '간섭'의 본질은, 고려국왕이 원 조정에서 몽골 황제권 하위의 '제왕(부마)'이라는 권력자로 부상하면서, 황실의 정쟁 그리고 권신의 발호 등으로 인한 그의 정치적 입지 변화가 그가 통치하는 외부 국가의 내외정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 것이었다. 부마ˑ승상이라는 위상이 고려 군주권에 이입된 것과 별개로, 그 결과 유지될 수 있었던 고려 국가 자체는 당대에 이미 '외국(外國)'ˑ'일국(一國, mulkî 'alîḥada)' 등으로 표현되었고, 그 상태는 '합병과 단순한 동맹 사이(between annexation and mere alliance)'이라는 탄력적이고 포괄적인 '복합 주권(Complex Sovereignty)'이나 '반주권(Semi-Sovereign)'으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원 제국과 '조공책봉관계'라는 주종관계를 맺은 고려의 위상은 '복합 주권'의 특질이자 그 등가 관계에 있는 종속(Dependency)ˑ자치(Autonomy)ˑ제후(Vassal)ˑ조공(Tributary) 등의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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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264년 5월, 쿠빌라이 카안이 원종에게 친조를 명령하였을 때, "조근은 제후의 중대한 법(朝覲 諸侯之大典也)"이라고 하였다. 《주례(周禮)》에서 제후가 천자를 찾아뵙고 공물을 바치는 '세현의 예(世見之禮)'의 관념을 거론하고 있었다. 그러나 몽골제국은 그 초기부터 '복속'의 증표로 군장의 친조를 요구하였고, 1219년 당시 고려에서도 '투배'를 받아내는 과정에서 고려 고종의 친조를 요구한 바 있었다. 그런데 훗날 명은 《대명집례》 〈번왕조공(蕃王朝貢)〉에서 한대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 당대 돌궐의 돌리 가한(突利可汗), 칭기스 칸 때 고창 위구르의 이디쿠트(군주) 바르죽 알 테긴 등이 친조한 일과 더불어 쿠빌라이 카안이 원종에게 '세일현(世一見)'을 명령하여 고려가 그 예를 좆았다고 해석하고 '친조'의 규범을 마련했다. 명 제국은 그 초기에 고려와 안남 그리고 점성 등의 외국 군주들에게 '세일현(世一見)'을 강조했다. 이러한 유동적인 해석력은 전형적인 '조공책봉관계'를 설정하기 어렵게 한다. 근래 고려-몽골 관계를 일반적인 형태로 알려진 '조공책봉관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는 경우가 있으나, 상기한 군장친조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몽골제국이 고려에 관철 내지 기도한 구조적 지배는 '조공책봉관계'의 예법으로든, 몽골인들의 전통으로든 분식될 수 있었다. 즉, '친조'와 더불어 '조군'과 '책봉' 그리고 '조공' 등은 몽골의 전통이든, '조공책봉관계'이든 외로아문 의례에서 학습한 것이든 그 명분을 혼일할 수 있을 만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았다. 청말의 경우에도, '조공책봉관계'를 매개로 한 청 제국과 조선의 종속 관계는 국제법 체계에서 '종주관계(Suzerain-Vassal relation)'라는 봉건적 관계(feudal relation)로 해석될 수 있었다. 청조는 이를 발판 삼아서 '조공책봉관계'의 제반 의례를 활용하여 조선과의 관계를 국제법 체계의 종속 관계로 재해석하거나, 반대로 유럽식 속국 체제를 모방하여 조약 등을 활용함으로써 '조공책봉관계'를 국제법 체계에서 한층 더 확인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몽골제국의 의례적 문란함을 차치하고라도 기왕의 '조공책봉관계'를 고려 내정에까지 제후(신하)의 위상이 구현되는 방식으로 '조군'을 매개로 하는 구조적 지배를 관철했다는 것이 명백한 이상, 고려-몽골 관계를 전형적인 '조공책봉관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것은 특정한 국가와 시기의 사례를 본질화ˑ모델화한 결과론적 해석이다. 이러한 전제는 역사적 맥락과 그 실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 장애 요인이 될 수 있다.

    2). 결혼을 통해 정치적 제휴를 맺는 현상은 전지구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성이지만, 세자 왕심이 카안에게 청혼한 내적 동기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1241년, 고려는 몽골군의 요구에 거짓으로 응하여 고려 문종의 아우 정간왕(靖簡王) 왕기(王基)의 후손인 왕준(王綧)을 고종의 왕자로서 영녕공(永寧公)에 봉하고 투르칵으로 삼았다. 1250년대, 영녕공 왕준은 뭉케 카안의 명으로 칭기스 일족과 혼인하여, 제실의 부마라는 위상을 얻은 바 있었다. 그가 고종의 왕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폭로되었지만, 그는 뭉케 칸의 지지 가운데 그 위상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종법적 권세를 활용하여 요심 고려인 홍복원을 참소해서 처형하였다. 그리고 동경 진수 중에 새로운 고려 민호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받거나, 고종 사후 고려 왕위 후보로 거론될 수 있었다. 이에 관한 연구로는 김웅학(2020). "몽골제국의 고려 지배와 王綧의 정치적 위상".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참조.

    3). 고명수는 다루가치의 철수가 충렬왕의 요청이 아니라 쿠빌라이 카안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음을 논증하였다. 그는 다루가치의 철수가 "충렬왕이나 호종신료가 몽골지배층과 능동적으로 교섭하여 거둔 외교적 성취가 아니라 쿠빌라이가 충렬왕의 파견 요청을 물리치고 스스로 내린 결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재고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다루가치의 철수가 충렬왕의 친조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성과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울 듯하다. 고명수가 쿠빌라이 카안의 최종 결정의 근거로 거론했듯이, 충렬왕은 1278년 4월 입조 당시 김방경 무고를 거론하면서 관군관과 다루가치의 사법권을 회수하거나, 부마의 격식에 의거하여 역참 사용권[箚子]을 다루가치가 아니라 스스로 발급할 수 있도록 요청하여 승낙받았다. 이는 충렬왕이 이미 상급자인 것도 모자라 다루가치의 권한을 회수한 것으로, 사실상 다루가치는 존재의의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충렬왕은 관례대로 석말천구의 후임자가 오지 않자 그의 유임을, 흑적 이후 공석이던 왕경 다루가치에 낭가타이의 임명을 요청했다. 그러나 쿠빌라이 카안 입장에서는 이미 다루가치가 고려국왕의 견제하지 못하는 와중에, 충렬왕이 다루가치의 권한을 회수하고자 하자 더이상 존치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연구는 몽골 황제권의 중요성과 과장된 공적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다루가치 철수에 있어 충렬왕의 의사를 지나치게 폄하한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관해서는 고명수(2016).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지역과 역사》 39. 참조.

    4). 고창 위구르ˑ티베트ˑ대리 등, 일종의 '불개토풍'의 정치체들이 카안 울루스 내부에 자리잡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라는 국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는 당대에 무종(武宗) 쿨룩 카안(külüg qa'an)이 제서(制書)에서 "지금 천하에 백성과 사직이 있고 왕노릇하는 것은 오직 삼한(三韓) 뿐"이라고 말한 데서 보다 명백해진다. 주치 울루스의 루스나, 훌러구 울루스의 케르만 및 아르메니아 등의 사례를 고려와 비교하면서 상대적인 특수성을 부정하려는 일각의 시도는 비교연구 자체로는 긍정할 수 있지만, 1260년대 몽골제국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의의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무종의 제서에서 언급한 '천하'에서 알 수 있듯이, 몽골이 고려에 '복속'을 관철한 시점에서 고려가 관계한 것은 몽골제국이 아니라 몽골제국에서 서방 3대 울루스와 분할된 카안 울루스(원 제국)에 국한된다.

    5). 교과서를 비롯한 대중적 서사에서, 원 '간섭'은 몽골의 고려에 대한 정치적 영향을 일방적이고 맥락 없는 부당한 참견으로 묘사된다. 가령 세자 왕심이 무신정권을 일소하기 위해 청혼하여 이른바 '부마국 체제'가 성립되고 결국 왕실의 호칭과 관제의 격하로 귀결되었다는 서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왕실과 관제의 격하는 송·요·금과의 외교 공간에서 천자와 제후의 관계로 구현된 기왕의 '조공책봉관계'가 부다루가치 석말천구의 지적이나 충선왕의 의사에 따라 내정에서 제후국 체제로 구현된 결과였다. 이에 관한 연구로는 이명미(2021). "역사·한국사 교과서 ‘고려-몽골 관계’ 서사 재구성 제안". 《歷史敎育》 160. 참조.

    6). 최윤정은 "몽골, 원의 ‘간섭’은 고려가 복속국으로 전락했거나 원의 지배를 받게 되어서가 아니라 고려 국왕이 몽골의 패권시대에 대칸가의 ‘쿠다’, ‘제왕’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향유하게 됨으로써 초래된 것이다. 더욱이 간섭은 원인이 아닌 경과라는 점에서 실질은 ‘원간섭기’가 아니라 ‘몽골제왕기’, 세계제국 몽골의 ‘天戚期’였다."고 평가한다. 최윤정(2022). "征東行省과 國王丞相 - 쿠빌라이의 전쟁과 고려왕권 -". 《歷史學報》 154. pp. 165-166.

    7). 권용철은 과거 '역개루'라는 역사 커뮤니티와의 대화 이벤트에서 "충선왕, 충혜왕 등의 폐위에 원 제국이 직접 개입하고 있는 현상과 정동행성의 설치와 같은 부분은 고려의 지위가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독립국과 식민지 사이의 어디엔가 위치하고 있다고 보게 합니다. 저는 고려가 ‘독립’했다 아니면 ‘속국’이다라고 단정하기보다는 그 당시 고려-몽골 관계의 특성 자체가 그렇게 이중적이었다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지금 독립과 속국이라는 개념이 우리에게는 완전히 정립되어 있지만, 그 중간에 속하는 어딘가에 대해서는 따로 용어도 없고 개념도 없지요."라고 하였다. 그는 '속국'과 '식민지' 사이에 가상적 등가 관계를 설정하고 있으나, 오히려 '종속국'이야말로 분할적이 위계적이며 상대적인 '합병과 수평적 동맹 사이'를 성문화('칭신봉표'와 '책봉' 등)한 질서, 즉 그가 말하는 "그 중간에 속하는 어딘가"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물론, 고려의 국가적 위상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것과 별개로, 고려국왕위와 결합된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제도적 위상들 자체는 다각적으로 규명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김호동(2006). 《몽골제국과 고려 -쿠빌라이 정권의 탄생과 고려의 정치적 위상》.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동북아역사재단·경북대학교 한중교류연구원(2011). 《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 동북아역사재단.

    고명수(2019). 《몽골-고려 관계 연구》. 혜안.

    미할 비란 외(2021). 《몽골제국 실크로드의 개척자들 - 장군, 상인, 지식인》. 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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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명수(2016).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 《지역과 역사》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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