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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결정적 원인이 청의 식량난이라는 속설에 대하여 - 홍 타이지를 중심으로 -

Chinu 2020. 12. 20. 15:44

명청교체기, 명 질서의 붕괴를 상징하는 병자호란은 2019년 전후로 새로운 연구 성과들이 제출되는 등 임진왜란에 이어서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와 함께 필자를 포함한 이른바 '역덕후'들 사이에서도 병자호란에 대한 논쟁이 활발해졌는데, 이 과정에서 출처불명의 와언들이 '최신 학설'로 둔갑되어 알려지고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청군 차병이 허위라는 주장과 함께 사료와 연구들을 단장취의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본다.

병자호란의 동인은 청의 경제적 문제인가


근래에 이른바 '역덕후' 집단 일각에서는 병자호란은 조선이 어떤 행보를 보였어도 일어났을 전쟁이라고 주장하면서 병자호란의 동인, 즉 핵심적인 계기를 소빙하기와 명의 무역 봉쇄 등에서 찾는다. 실제로 청은 이러한 연유로 경제 사정이 악화되고 있었고, 1630년대 한랭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1635년부터 1638년까지 연이은 기근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이것이 홍 타이지(Hong taiji)가 침략한 동인이라는 것은 비약 그 자체이지 않을까. 고작 식량 사정을 조선을 통해 타개하고자 한 것이었으면, 그가 새로운 존호(amba gebu)를 올리는 일에 조선이 참여할 것을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하면서까지 요구한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이 불발된 뒤 '친정'까지 감행한 역사적 흐름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1635년과 1637년에 또 식량 위기가 닥쳤다. 군대의 보급 부족은 만주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말은 너무 지치고 약해져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랴오시에서 농업 생산을 늘리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부유한 지주들에게 가난한 이웃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라고 권고해도 대체로 우이독경이었으며, 만주족은 그들이 떨어져 나갈까 봐 저가에 곡식을 팔라고 강제할 수도 없었다. 조선은 다시 한 번 매력적인 목표가 되었다. 만주족은 군사적 침략 위협으로 조선에 곡물을 제공할 것을 강요하고, 이윤이 나던 조선과 중국 간의 조공 무역을 금해서 그것을 자신이 독점하려 했다.
피터 C. 퍼듀, 《중국의 서진》, pp. 166~167.

병자호란의 동인이 청의 기근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인용하는 대표적인 논거는 바로 피터 C. 퍼듀의 글이다. 그러나 그는 병자호란의 동인이 경제적 이유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는 어디까지나 당시 청의 위태로운 경제 사정을 설명하면서 조선을 상대로 취한 경제적 조치에 대해 서술한 것일 뿐이다.

청 태종 홍 타이지의 초상.


1633년 6월 중순, 홍 타이지가 명, 차하르, 조선 중 정벌을 단행할 곳을 결정하고자, 제장들에게 소견을 진주할 것을 요구했는데,¹ 절대다수가 명에 대한 정벌을 단행할 것을 역설했으며, 어러훈 버이러(elehun beile) 두두(dudu, 누르하치의 장손)와 형부 버이러(beidere jurgan-i beile) 지르가랑(jirgalang, 슈르가치의 6남)의 경우 조선에 대해서 각각 "조선은 장악함에 있어 너그러운 것이 옳다(solgo be dailara be nanaki, 朝鮮在掌握可緩)"거나 "반드시 가서 칠 필요는 없다(dailara be joo, 不必往征)"라고 진주했다. 이것은 1630년대 청 수뇌부의 대조선 인식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에 대해 1635년부터 본격적인 기근이 있었지 않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후에도 식량 문제를 들어 조선 정벌을 청한 사례는 없다. 청 측이 개수를 거쳐 병자호란의 동인이 청의 경제 사정에 있음을 감췄다는 추론도 가능하지만, 식량(jeku) 사정으로 인해 조선을 출병할 외번 몽골 병력이 11월 30일 이전에 올 것을 금지하며 이것이 홍 타이지의 조서임을 감추고자 한 기록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점에서 개연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애시당초 경제 사정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을 친 것이라면, 홍 타이지가 1635년 12월 국서를 보내어 "왕은 대명의 국운(國運)이 쇠하지 않고 길이 바뀌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나는 대명이 기울어 무너질 때가 이르렀다고 생각하오(王以爲 大明國運未衰 永久不替乎 予謂大明傾頹之時至矣)"라고 하면서 '봉(奉)'과 '치(致)'라 글자를 문제삼아 차하르[揷漠]의 칸의 태후가 태자 콩오르[空俄羅] 등을 이끌고 귀의함으로써 서북 천하를 하나로 합친 형한(兄汗)인 자신을 극진히 공경할 것을 요구한 것을 시작으로, 같은 달 '수존호례(受號儀禮)'에 조선국왕의 동참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이전에 보내던 사절단과는 달리 후금의 버일러들과 외번 몽골 버일러를 함께 보내고 각 부에서 내귀한 무리들이 상당히 많고 군세가 성함을 과시하자는 예부의 버이러(dorolon-i jurgan-i beile) 사하랸(sahaliyan, 다이샨의 3남)의 제안을 받아들여 번거롭게 인열왕후의 조문을 빌미로 조문사 마푸타(mafuta) 및 춘신사 잉굴다이(inggūldai)를 필두로 한 200여 명의 사절단을 파견하고, 춘신사의 홍 타이지의 문안 한 통, 조문사의 국상의 조위(吊慰)에 관한 한 통, 여덞 호쇼이 버이러(jakūn hošoi beile, 執政八大臣) 및 외번 몽골 버이러들[geren goloi beise, 外藩蒙古] 명의의 봉서 두 통 등을 붙여 조선에게 수존호례에 동참할 것을 요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잉굴다이[龍胡] 등이 얼굴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우리 한께서는 정토하면 반드시 이기므로 그 공업이 높고 높다. 이에 안으로는 여덞 고산(高山, gūsa-i ejen)과 밖으로는 제번(諸藩, geren golo)의 왕자들이 모두 황제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자, 우리 한(汗, han)께서 ‘조선과는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니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각각 차인을 보내어 글을 받들고 온 것이다. 그런데 어찌 받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하고, 서달(西㺚: 외번 몽골)이 일시에 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천조()가 덕을 잃어 북경만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들은 금국에 귀순하여 부귀를 누릴 것이다. 귀국이 금과 의를 맺어 형제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필히 기뻐할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처럼 굳게 거절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제관이 군신간의 대의로써 물리치자, 잉굴다이가 성이 나서 고산 등의 봉서를 도로 가져가며 말하기를, "내일 돌아가겠다. 말을 주면 타고 갈 것이고 주지 않으면 걸어서 가겠다."라고 하였다.
《仁祖大王實錄》 권32


청 측의 시각에서 과장할 수 없는 조선의 실록으로 살펴볼 수 있는 후금 사절단의 반응은 상당히 당황스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의 수존호례 동참 요구에 대해 조선의 삼사·의정부·비변사·승정원 등 중앙의 정치기관 및 관학의 유생들의 격앙과 이에 따른 후금 측에 대한 무장 해제 및 사절단에 대한 숙위 금군이 감시에 잉굴다이 등은 민가의 말을 훔쳐 급히 도주하였다. 어차피 조선이 격앙될 것을 알고 이를 빌미로 침략할 예정이었다면 후금 사절단이 보여준 내륙아시아 부족정의 투박한 당황스러움은 너무나도 부자연스럽게 된다. 이후 급히 귀환하던 후금 사절단에게 탈취된 인조의 선전교서에 대해 홍 타이지가 제장들을 모아 논의하자, 모두가 격앙되어 대군을 보내어 조선을 필히 쳐 없애버리자고 반응한 것 또한 그러하다.


홍 타이지의 상복(常服), 길이 140cm, 소매 길이 67cm, 국가1급문물(国家一级文物).


홍 타이지는 일찍이 정묘호란 직후 아민(amin, 슈르가치의 장남)의 개선군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하늘이 우리를 사랑하여 조선을 항복시켰으니 명성을 알리고"라고 말하는 등 형제의 의를 맺은 조선이 이미 후금의 아래에 있다고 여겼으며, 선전교서 사태 이듬해 4월 11일 수존호례에서도 "옛부터 대대손손 군주들이 서로 다투었던 옥으로 된 보배의 도장(julgei jalan jalan-i han sei temsenuhe gui boobai doron)"의 획득², "혼일몽골(混一蒙古)"과 함께 "정복조선(征服朝鮮)"을 존호의 정당성으로 제시하였다. 홍 타이지에게 있어 조선과 체결한 강도맹약은 자신과 아민 사이의 권력 투쟁이 그대로 반영된 정묘호란의 업적이 자신에게 있음을 명확히 해주는 전공이었다. 때문에 홍 타이지가 '형제의 의'를 근거로 조선국왕도 존호에 대해 함께 논의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은 단순히 기만같은 것이 아니라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1636년 3월 1일에 인조가 8도에 하유한 선전교서를 잉굴다이가 탈취함으로써 3월 20일경 이를 보고받을 수 있었던 홍 타이지는 격앙되어 조선 정벌을 주장하는 제장들을 타이르며, "조선국왕의 아들들과 여러 대신들을 인질로 데려오라 하여, 보내면 끝내고 주지 않을 시에 다시 정벌을 논의하자"라고 하였다. 즉, 홍 타이지는 여전히 조선에 대한 침략에 있어서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던 것이다. 한편 화친 외에 대안이 없던 인조 정권은 3월 22일 이확을 회답사로 보내었는데, 4월 11일 후금이 춘신사 나덕헌과 이확을 수존호례에 참석시키고 삼궤구고두례를 강요하자 이 둘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으며, 홍 타이지는 이제 조선 측의 완강함을 확실히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친정 준비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1637년 조선을 굴복시킨 청은 보다 분명하게 조선에게 곡물유통을 강제했다. 청은 1637년부터 강남을 정복할 때까지 조선에게 매해 세폐미 1만 석을 바치게 하여 청의 성장에 있어 조선의 곡물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 이전 최종 결정권자인 홍 타이지의 행보를 볼 때 처음부터 경제 사정을 타개하고자 병자호란을 일으켰다고 볼만한 것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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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논의의 배경과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송미령(2008). "天聰年間(1627-1636年) 支配體制의 確立過程과 朝鮮政策". 《중국사연구》 54. pp. 175~178 참조.

2). 대원전국옥새에 대해 구범진(2012).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pp. 76~77에서 홍 타이지가 옥새를 통해 "이제 몽골 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군주를 자처할 수 있었다."라고, (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pp. 53~54에서는 "홍타이지는 몽고 제국 대칸들의 정통을 잇는 계승자의 자격을 하늘로부터 인정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으나, 전국옥새 지닌 절대적인 상징성은 홍 타이지가 고하였듯이 "옛적에 대대손손 군주(han)들이 서로 다투었던 보배의 도장(boobai doron)은 니칸(nikan, )·몽고·아오서(oose: 왜자) 그 어떤 나라에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 (자신이) 그 보배의 도장을 얻었"기 때문에 중요시된 것이다. 특별히 유목군주의 징표나 중화황제의 징표로 의식하지 않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구범진이나 片岡一忠(2008). 《中國官印制度硏究》. pp. 271~272에서 각각 몽골제국의 정통을 계승했다거나 중화 황제로서 위상 또한 지닌다고 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지 싶다.




송미령(2008). "天聰年間(1627-1636年) 支配體制의 確立過程과 朝鮮政策". 《중국사연구》 54.

이영옥(2012). "조청관계에 대한 편의적 이해 사례". 《동북아역사논총》 35.

김선민(2017), "접견례를 통해 본 아이신-다이칭 구룬(Aisin-Daicing Gurun)의 세계". 《韓國史學史學報》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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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범진(2020). "병자호란 전야 외교 접촉의 실상과 청의 기만 작전, 그리고 『청태종실록』의 기록 조작". 《동양사학연구》 150.

계승범(2020). "1637년 청나라의 조선 정복 전쟁 - 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까치, 2019)에 대한 서평". 《동북아역사논총》 69.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허태구(2019).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