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책봉은 동양의 보편적 외교 관계인가? - 명청대를 중심으로 -
굳이 한중 네티즌 간의 분쟁이 아니더라도 한국인들 사이에서 종종 이슈가 되는 조선 왕조의 정치적 위상 문제에 대해 일부 국내외 사학자 및 대중의 일반적 인식은 조선의 위상인 '조공국(Tributary state)'은 '속국(Vassal state)'이 아니며, 이른바 '조공책봉관계'는 동양의 보편적 와교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조선의 조공 행위를 경제적 욕구가 추동한 동양의 보편적인 외교관계로 일반화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조공국'은 '속국'이 아닐까?
I. 도식화 될 수 없으며, 중화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조공'
동양의 보편적 외교관계로 설명되는 조공은 주대 봉건제라는 기원을 갖는 유서깊은 외교 방식으로 설명되지만, 명대 이래 조공은 몽골제국의 교역망의 기조 위에 명과 상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 조건이 조정되고 형식화되는 가변성을 띄는 공무역 행위였다.
조선시대 조공 행위에 대해서 일주 사학자들과 대중은 이를 형세에 따른 사대 즉 실리적, 자주적 외교로 해석했으며, 그 사례로 조선이 명으로부터 1년 3공을 적극적으로 요청한 것을 들고 있다. 조공에 따른 명 제국의 하사품 뿐만 아니라 사행 과정에서의 무역적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조선의 경제적 이윤이 컸다고 설명함으로써, 조선의 조공 행위의 본질을 경제적 실리 추구라고 결론짓고 책봉은 사실상 허례로 취급하는 경향이다.
그러나 조선에게 있어 조공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한 부담을 지닌 행위였으며, 조공을 무역 행위로 인식한 것은 동남아시아 제국과 내륙아시아의 상인들의 입장에 불과하다. 조공이 엄숙하고 정연한 절차와 형식에 의해 진행되고, 정기적으로 책봉을 받고 책봉의 주체인 황제권의 실효성이 발휘된 조선을 비롯한 극히 일부 국가가 있었다. 납공했던 대부분의 나라들은 비정기적인 책봉을 받거나 아예 책봉을 받지 않았으며, 조공의 대상을 대내적으로는 종주국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예과 급사중(禮科給事中) 황기(黃驥)가 말하길, 서역의 사절은 대부분 고호(賈胡; 오랑캐 상인)인데, 진공(進貢)을 한다는 명목과 유사(有司)의 권한을 빙자하여 그 사사로운 이익을 경영합니다. 그 중 또한 가난하고 의탁할 곳이 없는 자도 있어 왕왕 투신하여 따르니 혹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 조공하기도 합니다. 공사(貢使)라는 이름을 붙이면 역전을 받고 진공한 물건은 사람을 부려 운반합니다. 감숙으로부터 경사(京師)에 이르기까지 매 역에서 급여하는 식량 비용이 적지 않으며 경사에 이르면 다시 상과 화물의 값을 주니 그 이익이 몇 배입니다. 이 때문에 호인들이 이익을 도모하여 도로를 왕래하니 조공에 쉬는 날이 없습니다.
《仁宗昭皇帝實錄》 권5 上
내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명청에 대한 조공은 위계적, 작제적 질서에 따른 의례로써 수행된 것이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카자흐와 청의 말 무역에서 보이듯이 카자흐와의 말 무역이 청 측 기록에서 공마(貢馬)로 왜곡되기도 하는 등 중화사상에 따른 허위성을 띄기까지 하였다. 반면 조선은 달랐다. 조명 관계에서 있어서 황제 개인의 성향이 때로는 가장 결정적인 변수가 되었을 만큼 크게 발휘되었는데, 황제의 여성 편력, 음식 취향 등을 이유로 영락연간부터 조선에 무관심한 어린 정통제가 즉위하기 전인 선덕연간까지 명 측에서는 연 평균 1.7~3회, 조선 측에서는 연 평균 7.6~12회씩이나 사신을 파견했다. 1637년 홍 타이지(Hong taiji)가 친정이라는 무력을 통해 성립시킨 조청관계에서는 1639년부터 1649년까지 아예 조공에 방물 외에 세폐(歲幣)를 추가하여, 품목과 수량을 청이 강제했다. 때문에 조선은 세폐와 방물 마련하기 위해 1639~43년에는 40~50만 냥, 1644~49년까지는 17~25 냥을 소요하여 극심한 대민 폐해를 야기했다. 즉 명청대 조선의 조공 행위는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유지됐다고 볼만한 것이 일체 없다. 공무역이라는 조공의 무역적 측면은 조공의 성격 중 그것도 경제적 측면의 한 단 면에 불과할 뿐이다.
II.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조공, 그리고 책봉
한국의 민족주의적 연구에서는 '조공관계'의 쌍방성과 양면성에 대해 주목한 구미 학계의 주장을 수용하여, 원대 이래 선택에 따른 '조공'이 불가능해진 점을 외면하였다. 그러나 상술하였듯이 조명, 조청 관계에서의 '조공'은 경제적 욕구에 위한 '선택'이 아니라 물리적 비대칭성과 폭력성에 의해 '강요'된 것에 가까웠다.
13세기 흥기한 몽골제국은 유라시아의 국제 질서를 재편했으며, 쿠빌라이 카안(qubilai qa'an) 치세부터 사실상 몽골 제국의 해체와 더불어 카안 울루스가 대도(大都, dayidu)으로 천도함으로써, 동북아시아에서는 대도를 중심으로 하는 원 제국의 일원적 국제질서가 형성되었다. 고려는 이 무렵에 몽골 제국의 '내속지국(內屬之國)'이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고려국왕에게는 부마(qüregen) 제왕과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승상이라는 중층적인 위상이 이입되었다.
14세기 후반 몽골 세력을 막북으로 축출하고 각지의 잔여 세력을 복속함으로써 원 제국의 유산을 상속한 홍무제는, 고려의 권력구조의 정점에서 직접적인 권위를 가졌던 몽골 황제권의 카리스마를 계승할 수 있었다. 그는 자국에게 곧바로 신속한 고려의 내정 문제에서 있어 명분 내지는 정치적 권위를 지닐 수 있었다. 이후 영락제가 북방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신의 근거지인 북평으로 천도하고, 1644년에는 청 제국의 섭정왕 도르곤(dorgon)이 그 유산을 점유하면서 북경 중심의 국제 질서는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혀갔다. 북경의 지근거리에 위치한 한양의 조선 조정에게 있어 '책봉'과 제반 외교 의례는 고려 전기1)에 비하면 한참 강화되고 엄숙해질 수 밖에 없었다.
무릇 사이(四夷)의 여러 나라가 와서 공물을 바치는 가운데, 오직 조선만이 본디 예를 지켜 류큐국과 같이 하례하러 오고 사은(謝恩)하며, 사자가 왕래함에 있어 문이(文移)가 서로 통하므로 부(符), 칙(敕), 감합으로써 신표를 삼지 않았다.
《皇明外夷朝貢考》 卷下, 朝貢 〈外國四夷符勅勘合沿革事例〉
1369년 공민왕이 명 제국에 신속한 이래, 조선국왕은 간접적으로는 '책봉'을, 비공식적으로는 유교의 예교 질서를 통해 명 제국과의 위계 질서를 내면화•정당화한 양반귀족층의 지지를 통해, 즉 명 황제권으로부터 간접적 혹은 비공식적으로 군주권을 보장받았다. 이 때문에 이성계는 요동 패권의 재구획 과정에서 홍무제의 치밀한 견제를 받아 '책봉'을 받지 못했으며 그 결과, 결국 대명 사행에서 커넥션을 형성한 아들 이방원이 일으킨 정변으로 실각하고 말았다. 이후 조선국왕은 명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아야만 그 지위가 유지될 수 있었으며, 명 질서의 쇠퇴 과정에서 명 황제권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항한 광해군은 반발 세력에게 '페모'와 더불어 반정의 강력한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양반귀족층의 지지라는 측면에서는 달리하지만, 1637년 이후 성립된 청 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홍 타이지(hong taiji)가 무력으로 조선을 복속하고 명의 구제를 승계했기 때문에 조선국왕의 즉위는 명대와 마찬가지로 '책봉'이 필수적이었으며, 조선 식자층의 '중화계승의식'과 별개로 대외적으로는 복속의 증표로써 '조공'과 '봉삭(奉朔)'을 의무적으로 행해야 했다.
조공제국(朝貢諸國)의 국왕은 칙봉(勅封)을 받고, 만일 사위자(嗣位者)가 나오면, 그들은 먼저 사절을 보내어 조정의 명을 청하게 하라. 조선, 안남, 류큐에는 정부사(正副使)가 흠명에 따라 칙서를 받들어 기타 여러 나라에 봉하러 갈 것이다.
《欽定大淸會通(第三部)》 권56
혹시 그 나라의 신방(防汛)의 관원이 금획을 막지 못하면 (예부는) 제본(題本)을 올려 (그를) 탄핵해서 치죄하도록 하고, (조선)왕도 동일하게 (예)부에 넘겨 의논하여 처리하라
〈私出外境及違禁下海〉 條例, 《大淸律例》 권20
《흠정대청회통(欽定大淸會通, Hesei toktobuha daicing gurun-i uheri kooli bithe)》 등은 새로 즉위한 세자는 칙봉(勅封)을 받아야만 공식적으로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음을 정례적으로 명문화하고 있으며, 조선국왕은 직간접적으로 청 제국의 법기(法紀)를 적용받아 18세기 무렵까지 외번 몽골 왕공 등에게 내리던 "은을 거두는(weile gaimbi)" 처벌을 종종 받았다. 이러한 의례와 조례(條例)는 모두 이 정례적 관계가 실질적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대목이다.
진공국(Tributary state)과 속국(vassal State), 진공국과 서로 봉건적 관계(feudal relation)를 맺고 있는 나라들은 그들의 주권이 해당 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한, 주권국(sovereignty)으로 간주된다.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Sixth Edition by William Beach Lawrence, Boston: Little Brown and Company, Advertisement to the first Edition, Part First Chapter Ⅱ §14, Tributary and vassal States, pp. 51~55.
속국(dependent States), 반주지국(半主之國, semi-sovereign States)의 통상(the rights of legation)은 필히 비호해주는 상위 국가(superior State)에 의존해야 한다.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Sixth Edition by William Beach Lawrence, Boston: Little Brown and Company, Advertisement to the first Edition, Part Third Chapter Ⅰ §3, Rights of legation, to what States belonging, pp. 273~274.
명청대 각종 의례 등에 의해서 명문화된 조선의 속국 지위는 허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했으며, 이는 가장 공손하고 신뢰할 수 있는 '외번', '번병', '조공국'이 조선이라는 중국의 피상적인 찬사로 나타났다. 조선의 지위를 횡단경계적 관점에서 보면 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만국공법(Elments of International Law)》이라는 국제법 체계의 반주지국(Semi-Sovereign State) / 속국(Dependent State), 진공국(Tributary State) / 봉신국(Vassal State)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그(고종)가 종속(dépendance)을 단호하게 부정하려고 애써왔음에도 불구하고, 천하 제국(Céleste-Empire, 청)의 속국임으로 인해 강요당하는 치욕적인 의식을 수행할 결심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양 국가들과 조선간에 체결된 조약 이후 거행한 행사 중 가장 중요한 행사이기 때문에 각하께 자세한 전말을 보고 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외무부 문서〉 4, V. Collin de Plancy to Monsieur Ribot, Ministre des Affaires Etrangeres, le 10 Novembre 1890.
그때까지 조보에서는 진행만 알려주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중국(Chine)에 매년 조공(tribut)을 보낸다는 사실 이외에는 그에게 부과된 종속(dépendance)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저희들은 공사관과 영사관에 보내는 서신을 제외한 모든 왕실(royaux)의 문서와 공문에 광서연호와 일자가 찍혀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매년 겨울이 오기 전에 달력을 받으러 북경(Pékin)으로 떠났던 사신이 돌아온다는 사실(1888년 12월 30일자 제35호 정치공문 참조)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국(Empire)이 조선의 후견국(patronage)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는 의식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즉위 인정 승인 요청과 사신 접대입니다. 이는 특히 왕권(la Majesté souveraine)과 양립할 수 없는 행위를 요하기 때문에 왕 개인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 저희는 성대한 의식을 통해 왕이 두 번이나 도성에서 나와 사신들을 영접하고 환송하였고 칙서에 목례를 하고 무릎을 꿇고 조의문을 경청했으며 자신은 궁궐 옆문으로 출입하면서 칙서가 출입할 수 있도록 정문을 내어주고 사신들을 예방하고 사신들이 머무는 관저 초입에서 가마에서 내려 영빈관까지 걸어갔을 뿐만 아니라 쉬창(Sui-tchang)과 총리(Tch’ong-li)는 왕보다 먼저 대접을 받는 등 왕보다 위라는 것을 인정받았으며 성문의 개폐를 결정하고 형집행의 실행을 중단시킬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입증은 결정적인 것으로 조선의 종속성(état de vassalité)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사려됩니다.
〈프랑스 외무부 문서〉 4, V. Collin de Plancy to Monsieur Ribot, Ministre des Affaires Etrangeres, le 16 Novembre 1890.
실제로 청 제국은 아편전쟁이라는 '서구의 충격'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서구 세계에세 '보호국(Protectorate)'과 '봉신국(Vassel State)'의 개념이 명확히 분리되고 보호국이 식민지로의 병합(annexation)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봉건적 종주권이 20세기 초에 이르면 사실상 사라지는 시대적 양상에서 봉건적 종주권을 간취했다. 청조는 전통적으로 성문화되었던 종주권을 근거로 1882년 군대를 파견해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고 조선이 속방(Dependent State, Semi-Sovereign State)임을 국제법적 체계에 맞추어 조약에 명문화했으며, 한편으로는 1890년, 신정왕후 조씨의 조문사를 파견하여 고종이 청 칙사에게 영칙례를 강요하고, 나아가 1893년에는 북경을 형해 망궐례(望闕禮)3)를 행하게 함으로써 열강의 공사들에게청 제국의 종주권을 관철시켰다.4)
III. 조선의 수많은 조공국 중 하나였을 뿐인가
《흠정대청회전(第四部)》에는 조공국으로 조선, 류큐, 베트남, 란쌍(南掌, nan jang), 사얌(暹邏, siowan lo), 술루(蘇祿, sulu), 버마[緬甸, miyan diyan], 네덜란드[荷蘭], 사예조공지국(四裔朝貢之國, 포르투갈, 바티칸, 영국 등)을 열거하고 있으며, 《청사고(淸史稿)》에서는 코칸드, 키르기즈, 카자흐, 구르카 등도 속국전에 실었다. 조선은 수많은 속국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일까? 이른바 '역덕후'들이 조선의 위상을 두고 논쟁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조선의 '조공'과 당연히 '조공'에 정치구조적 의미를 일정이상 두지 않았을 영국이나 일본의 교역(호시)을 '조공'으로 표현한 것을 동일시하면서 그럼 영국이나 일본 등도 속국이냐는 식으로 반문하는 것이다.
중화사상을 표현하는 데 활용된 한문 사료에서는 '책봉'을 빼놓고보더라도 조공에 있어 '칭신'을 전제하기 일수이다. 그런데 상술한 중화사상이라는 이념형 관계에서 위계 질서는 허구적일 수도 실질적일 수도 있다. 위에서 예시로 든 유형은 '칭신'을 의도하지 않은 교역을 '조공'으로 허위 기재했다는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나, 조선의 '조공'도 그것에 포함시킴으로써 의식적인 왜곡을 시도한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은 명청 제국의 지배질서 속에서 북경의 지근거리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좋든 싫든 간에 그들의 주권(Sovereignty)은 양자간 봉건적인 관계(feudal relation)의 영향을 크게 받은 실질적인 반주지국•종속국일 수밖에 없다
칭신을 최종적으로 공인하는 것이 '책봉'인데 청대 책봉을 위해 칙사를 파견한 유형은 조선, 류큐, 베트남 세 나라에 불과했으며, 조공 사절에게 칙(敕), 인(印)을 수여하여 돌아가게 하는 영봉(領封)의 유형은 사얌, 버마, 란쌍 세 나라, 즉 책봉을 받은 나라는 총 6국에 국한된다. 그런데 사얌, 버마, 란쌍국왕에 대한 책봉 경위를 살펴보면 일회적이거나 이벤트성을 띄는 책봉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1673년 강희제로부터 섬라국왕으로 책봉받은 자는 아유타야의 군주 나라이(นารายณ์)였고, 1786년 건륭제로부터 책봉받은 자는 정화(鄭華)라는 이름으로 탁신(ตากสิน, 郑昭)의 왕자를 사칭한5) 랏타나코신의 군주 풋타엿파쭐라록(พุทธยอดฟ้าจุฬาโลก)이므로 개별 왕조들에 대한 일회성 책봉이었음을 알 수 있다. 버마의 경우 1790년, 건륭제가 팔순만수를 축하하는 과정에서 꼰바웅의 보도파야(ဘိုးတော်ဘုရား, 孟雲)를 면전국왕으로 책봉한 것이 끝이며, 란쌍의 경우에는 1795년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운남과 베트남을 떠돌던 옹 만쿠(溫猛)를 재위 60년을 기념하며 책봉한 것이 끝이다.
류큐의 경우, 1653년 그 군주 쇼시쓰 왕(尚質王)이 입조하면서 류큐국왕지인(琉球國王之印, lio cio gurun-i wang ni doron)을 사여받는 등 청조와 '조공책봉관계'를 맺었으나, 류큐는 이미 1609년 사쓰마 번의 침략을 받고 쇼네이 왕(尙寧王)이 포로가 되어 가고시마에 압송되어 에도까지 방문했다가 2년 뒤에 귀국한 이래 실질적으로 서일본에게 종속되어 있었으므로, 이후 명청 제국과의 종속 관계는 허구에 가까운 것이었다.
중국과 조선은 있으면 있는 것이고, 망하면 모두 망하는 이치이다. 조선이 없으면, 중국도 없으니 베트남과 (조선은) 비교할 수 없고, 운남이나 광동과 같은 먼 성(省)과도 비교할 수 없다.
《袁世凱全集》 1, 〈摘奸論〉
베트남의 경우도 류큐 이후 청 제국에 ‘칭신입공'였다. 응우옌푹아인(阮福映)은 응우옌 왕조를 개창한 직후 청조에 '입공'하고, 아울러 '남비엣(南越)'이라는 국호를 청했다. 1803년 가경제는 '남비엣'을 회피하고 '베트남'이라는 국호를 지정해주는 한편 푹아인을 월남국왕으로 책봉하면서 양자간 '조공책봉관계'를 수립하였으나, 청 제국과 베트남 사이에는 간간히 의례적인 사절만이 오고갈 뿐이었다. 1839년 청조는 베트남의 조공 사행에 대한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류큐와 같은 2년 1공에서 3년 1공의 사얌보다 낮은 4년 1공으로 조공을 감축했다. 게다가 1788년 양광총독을 책봉을 위한 칙사로 파견한 이래, 베트남의 칙사 인선에 있어서 내각전적(內閣典籍, 正7品) 등에서 임명한다는 《대청회전》의 규칙은 지켜지지 않았고, 1884년 응우옌푹응쩐(阮福膺禛)까지의 책봉사는 모두 지방관인 광서안찰사(廣西按察使)가 임명되었다.
건륭제는 일찍이 후레 왕조를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떠이선 왕조에 대한 침공을 감행했으나, 떠이선 왕조와의 신경전을 끝으로 철군하여 종주국의 의무를 다했음을 생색내기만 하였고, 청군의 지휘관인 푸캉안(fuk'anggan, 福康安)은 응우옌반후에(阮文惠)가 팔순만수에 직접 참여한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응우옌반후에는 청조를 기만하여 조카 팜반트리를 팔순만수 행사에 참여시켰으나, 건륭제는 그가 응우옌반후에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팜반트리를 극진히 대접했다. 응우옌푹아인 이래 응우옌 황제들은 철저한 '외왕내제'를 구현하기 위해 청에 인접한 하노이에서 베트남 국왕으로 책봉받았으며, 푹아인에 이어 황제가 된 응우옌푹끼에우(阮福晈)는 즉위식에 앞서, 청 측이 규정한 삼궤구고두례와 같은 책봉의례를 거부하며, "나는 스스로 내 나라의 예를 행할 것이다."라고 공언했다. 청의 칙사들은 이러한 응우옌 황제들의 예법을 존중했다. 청은 베트남의 '외왕내제'를 인지하고 있으나 "사대의 뜻을 알고 우리는 자소(字小)의 어짐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6)
이상을 검토해본 결과 청대에 이르러 실질적인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한 나라는 사실상 조선 뿐이었으며, 잘봐줘도 '조공-책봉 패러다임'에는 청, 조선, 류큐, 베트남, 사얌만이 있을 뿐이었다. 명청대 조선의 속국 지위는 조선을 제외하면 류큐, 베트남, 사얌에서만 어느정도 구현되었을 뿐이며, 이마저도 허례적인 측면이 상대적으로 강했다. 그 점에서 조선의 특수한 위상을 동아시아의 보편적 외교관계로 둔갑시키는 해석은 역사 왜곡에 가깝다고 판단되고, 자칫하면 유라시아의 교역 방식의 일부인 조공 무역의 성격을 크게 왜곡할 우려가 있다.
----------------------------------------------------------------
1). 거란은 송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 서하가 타국과의 교섭에서 황제를 자칭하거나, 고려가 제후국 체제에 대한 목적의식적 지향이 부재하여 내부적으로 황제국 체제의 제도나 용어를 사용한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고려는 어디까지나 형세에 따른 사대를 표방했을 뿐, 공손한 번국이 아니었기에 거란-금과 송의 대립 속에서 '피책봉'의 상징성을 이용하여 거란·송·금의 연호 시행을 통해 '책봉국'의 정통성을 승인 혹은 부정하기도 했다. 1031년 10월, 거란이 이전에 억류된 고려 사신의 석방과 압록강 부교의 철거를 거부하자, 고려는 1037년까지 거란과 단교하고 흥종의 연호 '태평(太平)' 대신 기존의 연호를 고수하며 사신의 왕래를 막은 것이 대표적이다. 조공에 있어서도 고려 전기 거란에 대한 조공은 송이 거란과 금에 납부한 세폐, 고려 후기 고려가 몽골에 공납한 세공, 명청대 조선이 명청에 공납한 조공과는 양적, 질적으로 다른 상징적인 '선물'의 의미가 강하여 조선시대와는 달리 조공이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지 않았다. - 윤영인(2010). "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제언과 모색》.
2). 이윤의 왕세자 책봉 사례에서 청 황제권이 발휘된 사례를 엿볼 수 있다. 강희제가 《대명회전》의 "왕과 왕비가 오십이 될 때까지 적자가 없어야, 비로소 서장자를 왕세자로 세울 수 있다"라는 조문을 근거로 세자 책봉을 불허하자, 숙종은 정사 서문중, 부사 이동욱, 서장관 김홍정을 삭탈관직하고 문외출송시키는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 손성욱(2020).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조선인들의 북경 체험》. pp. 154~162.
3). 몽골복속기 이전까지 번국의 군주가 황제를 대상으로 망궐례(요하례)와 고려가 원 황제를 상대로 망궐례를 거행하면서 명청대까지 번국의 의례로 당연시되었다. 자세한 건 최종석(2019). "고려후기 ‘전형적’ 제후국 외교의례의 창출과 몽골 임팩트". 《민족문화연구》 85; (2020). "원 복속기 遙賀禮(望闕禮)의 거행과 예식 변화상 -원종․충렬왕대를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59. 참조.
4). 청조가 기존의 종속 관계를 국제법적 '반주지국'과 '속국'으로 재해석 및 재편하는 경위와 그 과정에서 중국과 서양의 '속국체제'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에 관해서는 필자의 다른 글을 참조. https://chinua.tistory.com/19
5). 탁신의 중국식 성을 사칭하는 것은 라마 1세 풋타엿파쭐라록 이래 일종의 관행으로 자리잡아 청을 상대로 하는 국서에서 라마 2세는 '鄭佛', 라마 3세는 '鄭福', 라마 4세는 '鄭明'이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했으며, 라마 5세에 이르면 본명인 쭐랄롱꼰(จุฬาลงกรณ์)을 음차하여 '抽拉郎公'라고 하였다.
6). 원대에도 비슷하게 1267년 몽골은 베트남에게도 "군장친조(君長親朝)', '자제입질(子弟入質)', '편민수(編民數)', '출군역(出軍役)', '수납세부(輸納稅賦)', '치다루가치' 등 ‘6사’를 요구했으나, 사실상 거절당하였고, 1283~87년 세 차례의 전쟁 과정에서, 1285년 쩐 태종(陳太宗)의 아들 쩐인택(陳益稷)을 안남국왕(安南國王)에 책봉했지만 그는 몽골에 내투했던 인물이었다. 1289년 몽골은 화의를 요청했고, 베트남에서도 사신을 보내어 진공(進貢)으로 화답했다. 쿠빌라이 카안은 쩐 인종(陳仁宗)에게 다시 군장친조를 요구했으나 쩐 인종은 이를 거부했으며 쿠빌라이는 네 번째 원정에 착수했으나 도중 사망하였다. 1294년에 쿠빌라이를 이어 즉위한 울제이투 카안(Öljeyitü qa'an)은 베트남 원정의 종언을 고하고 조서를 내려 베트남과 화의를 도모했으며, 베트남 측도 이후 새로운 카안이 등극하는 등의 경사에 종종 표문을 지어 올려 우의를 다졌다. 베트남은 조공에 수반되는 경제적인 이윤을 챙기면서도 실제 쩐 황제들은 전쟁 이후 몽골의 책봉을 받지 않으면서 정치적 간섭을 배제시켰다. - 이익주(2010).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제언과 모색》. pp. 166~167; 조원(2019). "몽골의 동아시아 전쟁과 지배 질서의 재편 -쿠빌라이시기의 전쟁을 중심으로-". 2019年 東洋史學會 冬季硏究討論會. pp. 154~155.
계승범(2010).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제언과 모색》.
구범진(2010).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제언과 모색》.
유바다(2012). "朝鮮 初期 迎詔勅 관련 儀註의 성립과 朝明關係 ". 《역사민속학》 30.
정동훈(2013). "명초 국제질서의 재편과 고려의 위상 -홍무 연간 명의 사신 인선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89.
홍선이(2014). "歲幣 方物을 통해 본 朝淸관계의 특징". 《韓國史學報》 55.
윤옥(2016). "淸朝 下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역사와 경계》 106.
이명미(2017). "성지(聖旨)를 통해 본 여말선초의 정치·외교 환경". 《역사비평》 121.
홍성화(2019). "淸末 베트남 사태에 관한 인식과 대응". 《明淸史硏究》 52.
정동훈(2019). "명초 외교제도의 성립과 그 기원 - 고려-몽골 관계의 유산과 그 전유(專有) -". 《역사와 현실》 113.
이재경(2019). "大淸帝國體制 내 조선국왕의 법적 위상 ―국왕에 대한 議處⋅罰銀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 83.
이동욱(2019). "청말 종주권 관념의 변화와 조선 정책의 전환". 《史叢》 96.
한지선(2020). "15세기 명・티무르제국 간의 조공무역과
인도양 교역 네트워크 ― 중국 문헌자료에 나타난 세계화의 단상 ―". 《明淸史硏究》 54.
유바다(2019).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高麗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구범진(2012).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